서글픈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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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8월 14일
  • 김주호 <한국스카우트 충남연맹 이사>
  • 승인 2019.08.08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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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이라 하면 누구나 다 아는 경사스런 날이다. 그런데 하루 전인 8월 14일은 잔인하고 서글픈 날이다. 독립투사 유상근 선생이 일제의 만행으로 순국하시고 위안부 출신 김학순 할머니께서 그 참담하고 치욕스런 위안부의 실상을 용기를 내어 폭로한 날이다.

유상근 선생은 강원도 통천에서 출생했다. 1930년 약관 스무살에 상해로 가서 한인교민단장(당시) 김구 선생을 만나 김구 선생의 일을 돕다 1932년 한인사회 치안과 밀정 처단을 위해 조직된 의경대에서 활략하다 같은해 윤봉길 의사와 함께 김구 주석의 권유로 한인 애국단에 가입했다.

관동군 사령관, 남만주철도 총재 등 요인들을 암살하는 의거조직부에 선발돼 훈련 및 준비활동을 하던 중 일경에 발각 동지들과 함께 체포돼 일본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련 관동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여순감옥에서 복역중(13년간)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총살형으로 순국했으니 이 어찌 안타깝고 통탄할일이 아니겠는가!

그날은 이미 다음날 일본의 항복선언이 예정된 날이고 그걸 모르는 일본 관리는 한 사람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사형수도 아닌 무기수를 무슨 재고처리를 하는 물건처럼 서둘러 사형을 집행했으니 일제의 악랄함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뒤늦게 1968년 3월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나 피끓는 젊음을 조국에 바친 유상근 선생의 순국은 너무도 아쉽기 그지없다.

김학순 할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군의 딸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 안돼 부친이 사망하고 모친이 평양으로 데려와 재혼을 하고 초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기생수업을 받았으나 나이가 어려(당시나이 17세) 허가를 받지 못해 일을 할 수 없어, 일을 할 수 있다는 베이징으로 계부, 계언니와 함께 갔다가 계부는 체포되고 김학순은 계언니와 함께 일본군에게 끌려가 욕을 당하고 말았다. 

위안소에서 5명의 조선 여성들과 위안부 노릇을 했는데 말이 위안부지 하루에 10여 명 이상을 상대하는 참담한 생활을 하던중 40세 전후의 조선인 남자가 김학순의 방을 찾아 왔을 때 그에게 사정해 그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위안소를 탈출했다. 그후 그 남자와 결혼해 남매를 낳고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생활하다 해방후 귀국했으나 6.25때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초등학교때 익사하는 등 불행의 연속이었다.

서울의 한 판잣집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고 그나마 교회에 다니면서 과거의 일은 덮어두려 했으나 1990년 6월 일본이 ‘일본군은 위안부 문제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는 발표에 격분해 그 만행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여자로서 그런 치욕을 당했다는 것이 참담하고 곤혹스러워 망설이다 1년 후인 1991년 8월 14일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해 세상에 알렸고 이후 수십명의 위안부 들이 나도 그런일을 당했다고 용기있는 고백을 했다.

동년 12월 동경지방재판소에 이를 제소했고 1994년 6월 미야자와 총리의 방한을 앞두고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이라는 증언집에서 위안부 생활을 구체적으로 공개해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항의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일본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촉구하고 정신대 문제를 국제사회 문제로 확대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위안부의 애환을 다룬 연극 ‘노을에 와서 노을에 가다’에 직접 출연도 했고, 1997년 12월 평생 모은돈 2000만 원을 동대문 감리교회에 기부한 후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1992년 1월 8일에 시작된 수요집회는 2012년 12월 14일 1000번째 집회가 열렸고 금년 7월말로 1346회가 열렸다.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소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나 일본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니 후안무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생존해 계신 위안부들은 20명이 채 안된다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들을 추모하고 위안부의 실상을 전국민이 알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저 나갔고 본군에서도 뜻있는 독지가들과 군민 성금으로 홍주성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 바 있다.

8월 14일에 순국한 이상근 선생, 위안부 만행을 폭로한 김학순 할머니, 광복 하루전이면 전야제라도 열어 자축해야할 날이지만, 이면 한 구석에 이런 안타깝고 서글픈 사연이 있어 이런 황당하고 씁쓰레한 기분은 결코 필자 만은 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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