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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지역에서 첫 필화사건 발생홍주신문 지령(紙齡) 600호 발행 특집
홍성지역의 언론 600년을 말하다<5>
1960년대 홍성군청.

앞에서 얘기한 분위기 속에서 홍성에서도 첫 번째 필화사건이 발생했다. 동아일보 정상희(鄭祥熙) 기자가 서천(舒川)경찰서에 취재를 하는 동안 경찰에서 사건을 밝히려 들지 않자 검찰지청 직원을 사칭해 홍성경찰서에서 경비 전화로 취재를 했다. 취재는 일단 성공했는데 그 기사가 보도되자 검찰에서 문제를 삼았다. ‘기자가 관명사칭을 했다’고 정상희(鄭祥熙) 기자를 구속해버린 것이다. 이후에 동아일보 본사에서도 현지에 내려와 진상을 조사했고 정 기자는 바로 석방은 됐으나 신문을 이해하지 못한 분위기가 당시 이러한 사건을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계기가 된 셈이다.

이 무렵 지국장들도 주재기자들이 매일 보도하는 기사로 인해 공박을 받기도 했다. 그때까지 지방언론은 지국장 중심으로 이끌려왔기 때문에 독자들은 기자가 취재한 기사를 보도되지 않도록 해당신문사 지국장에게 부탁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사보도와 지국장의 업무는 이미 구분돼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기자가 취재한 기사를 보도되지 않도록 해당 신문사 지국장에게 부탁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사보도와 지국장의 업무는 이미 구분돼 있었기 때문에 취재된 기사는 그대로 보도됐고 보도될 때마다 지국장만 난처한 경우에 몰리는 수가 많았다. 그래서 지국장들은 기자와 자주 만날 수 있는 공동모임을 만들자고 제의해 왔고 기자들도 이에 호응해 우선 지방언론인의 친목을 도모한다는데 뜻을 두고 ‘홍성신문인협회’라는 홍성지방만이 갖는 편의단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협회운영은 지국장들에게 맡기기로 했고 회장단도 지국장으로 구성했다. 회장에 경향신문지국장 신경희(申景熙), 부회장에 대전일보 지국장 주연종(朱連鐘), 중도일보 지국장 김용무(金容武)로 구성된 홍성신문인협회(洪城新聞人協會)는 매월 월례회를 열었고 지방기사가 문제시될 때에는 필요한 대로 모임을 갖기도 했다. 홍성신문인협회가 만들어진 이후 지국장과 기자가 모두 한 덩어리가 돼 움직였던 사건이 홍성지방에서도 발생했다.

1963년 홍성경찰서.

사건은 홍성경찰서에서 그 당시 성행하는 도박을 ‘도박꾼으로부터 상납을 받고 묵인했다’는 풍문아래 홍성읍내 모(某) 요정이 도박꾼들에게 도박판돈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읍내 곳곳에서 여론화가 됐고 기자들까지도 경찰과 같이 주민들로부터 오해를 샀다. 기자들은 이 같은 주민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경찰들의 비행을 취재하기로 했다. 막상 취재에 나서자 제보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협회에서 제보자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중앙일보(中央日報) 이환세(李桓世) 지국장이 기자들 취재에 협조해 주기로 하고 제보자와 만나 제보내용을 녹음한 후 보도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헌데 난데없이 동아일보 가십난에 경찰상납기사가 터져 나왔다. 당시 동아일보 홍성주재기자인 이붕원(李鵬遠)이 특종의식을 가지고 확증을 잡기도 전에 기사를 써버린 것이다. 경찰은 발칵 뒤집혔다. 허위보도로 기자를 구속한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이붕원(李鵬遠) 기자를 일단 숨겨 놓고 경찰과 대치했다. ‘상납에 대한 증거는 설사 구속이 되더라도 밝히지 않는다. 다만 법원에 기소된 후 법정에서 밝히겠다’라고 기자들도 경찰에 엄포를 놓았다. 확증을 갖고 있지 못한 가운데 증거를 가진 듯 배짱을 부린 셈이다. 당시 대전지검홍성지청(大田地檢洪城支廳) 박준(朴俊) 검사의 중재 비슷한 조언으로 경찰이 후퇴하면서 이 사건을 없던 것으로 돌리기로 기자들과 합의가 이뤄졌고 집을 빼앗길 뻔했던 요정도 되돌려졌다.
이 사건은 홍성지방 언론인의 단합을 과시했던 재미있던 일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홍성신문인협회 회원인 지국장과 기자들은 매일 아침 당시 조양문(朝陽門) 로터리에 있던 ‘달나라다방’에 모여 이 사건 뒤처리에 몰두했었다. <다음호에 계속>

한기원 기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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