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세월과 시대의 변화 비켜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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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세월과 시대의 변화 비켜갈 수 없었다”
  • 황동환 기자
  • 승인 2019.09.06 09: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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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항 담양전(田)씨 99칸 종갓집의 추석맞이
낡고 허름한 고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담양전씨 종갓집.

일주일 뒤면 한국 최대의 명절인 추석이다. 그리고 해마다 볼 수 있는 낮익은 풍경, ‘민족대이동’이 어김없이 펼쳐질 것이다. 추석 당일을 끼고 3일간 공휴일로 지정됐는데 올해는 일요일까지 4일간 연휴를 보낼 수 있다. 한가위, 중추가배, 중추절 등은 해마다 돌아오는 음력 8월 15일 즈음 어김없이 들을 수 있는 추석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추석에 한국인들은 추석빔을 입고 햅쌀로 빚은 송편과 여러 가지 햇과일·토란국 등 음식들을 장만하여 조상들께 감사의 마음으로 차례를 지낸다. 평소 왕래가 뜸했던 친척들이 고향집에 모여 차례음식을 나눠먹으며 저마다 품에 안고 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살아온 근황들을 주고 받는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철도와 도로로 전국의 교통망이 촘촘이 이어져 있어 굳이 명절이 아니더라도 마음먹기에 달려있을 뿐이지 평소 고향 방문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대이동’은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  예전의 불편했던 교통수단에 따른 물리적인 거리감이 있었다면 지금은 바쁜 일상에 묻혀 잊고 지냈던 혈연들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만이라도 해소해보고자 하는 심리가 ‘민족대이동’을 작동시키는 것은 아닐까? 스마트폰에 SNS 등 손쉬운 연락망과 고속철도와 전국방방곡곡을 잇는 교통망이 오히려 가까운 가족들 간의 대면접촉 기회를 빼앗는 것 같은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예전 명절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일까? 종갓집에 가면 그 모습을 만날 수 있을까? 그래도 종갓집은 예전 명절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찾은 곳이 있다. 홍성의 대표적인 종갓집으로 알려진 구항면 내현리 담양전씨 집성촌이다. ‘가보고 싶은 한국마을 100선’에 이름을 올리면서 ‘거북이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곳은 담양전씨 집성촌이 있는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담양전씨 전통가옥인 장충양각, 전용석 고택, 서낭당 돌무덤, 대나무 숲길 등 문화재와 역사 속 인물들을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 보존에서 변화를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자신들을 고려시대 왕건의 후손이라고 소개하는 80대 전용석·윤송자 노부부를 전용석 고택 옆 현대식 가옥에서 만났다. 노부부는 먼저 담양전씨가 담양이 아닌 홍성에 정착하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왕건이 망하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피해서 숨은 곳이 홍성 구항면이지, 그래서 오래동안 담양전씨 시조사당도 이곳에 있었어”

지금은 전통가옥 몇 채만 남아 있는 탓에 노부부가 전하는 대지 3000평에 99칸짜리 기와집의 규모와 분위기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당시엔 집주위로 하인들이 사는 초가집만 6채가 딸린 전형적인 종갓집이었다고 설명했다.

집안의 종손인 전용석 씨는 40여 년 전 99칸짜리 기와집의 일부를 허물고 새집을 지었다고 한다. 어쩌다 강풍이 불거나 장마비로 인해 지붕의 기와가 파손되는 일이 잦았고, 이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시조를 모시는 사당도 30년 전에 전남 담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경상도, 전라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는 담양전씨 후손들이 전형적인 시골길에 마땅한 교통수단도 없던 시절 이곳으로 오기 불편했기 때문이다.

전 씨에 따르면 99칸 기와집이 있던 시절 명절이나 제삿날이면 구항면 인근에서 모인 친지들이 적게는 40명, 많게는 80명까지 모였다고 한다. 종손 며느리로 시집와서 겪은 고생을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윤송자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부잣집에서 시집왔는데도 여기서도 부자야, 송편을 빚더라도 한 말씩 했어, 한 말이면 8kg이야 엄청났지, 그때는 직접 술도 담궜지만 세상이 바뀌면서 준비하는 음식의 양도 점점 줄었어. 처음엔 시골서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어 친정집에 하소연 한적도 있어, 시어머니는 옛날식으로 살았고, 나는 그래도 그에 비하면 개화됐었지, 명절 음식은 시어머님이 차렸는데, 난 어머니 뒤따라 다니면서 정리하는 수준이었고 사실 난 음식 잘 할 줄 몰랐어”

종손 며느리 윤 씨가 기억하는 당시의 명절은 윤 씨의 말을 빌어 표현하면 “완전히 잔치”였다고 한다. 구항면과 은하면에 살고 있는 6촌, 8촌 친척들이 명절이나 제삿날 등 집안 대소사로 모이면 대청에 서있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윤 씨 시어머니가 이들을 위해 음식들을 다 차려줬다.

시어머니의 진두지휘하에 하인들은 직접 재배한 재료로 명절음식을 만었다. 설이나 추석이 다가오면 개나 소도 잡아 잔치를 했다는 것과 손님 맞이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광에 늘 고기가 매달려 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종손 며느리가 기억하는 예전 명절 풍습도 이제는 지나간 과거사가 됐다. 요즘은 사촌까지 다 객지로 나가있어 추석명절은 예전과 달리 간소하게 지낸다고 한다.
 

낡고 허름한 고택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담양전씨 종갓집.

■ 어느 80대 노부부가 전하는 옛 종갓집의 모습
그래도 다른 종가집과는 다른 담양전씨 가문만의 전통적인 명절모습이 있지 않을까? “옛날 어렸을 때는 전통주 별도로 담갔으나, 지금은 다 잊어버렸어요. 송편도 빚은 것을 사옵니다. 가끔 조금씩 빚긴하지만, 손주들 보여주려고 하는 거죠. 지금은 정말 간단하게 해요.” 그래도 담양전씨 종가댁 큰 며느리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음식비법도 전수받았다. “우리 어머니로부터 김치와 고추장 담그는 법을 배웠어요. 엿 고우는법, 메주 쑤는 방법도 배웠죠.”

지나간 옛일에 대한 회상도 잠시, 당시의 힘들었던 기억도 되살아났나보다. 시어머니가 “야 너 이거 힘들어서 어떻허냐?”라고 물으면 윤 씨는 시어머니에게 “어머니 자식들이기 때문에 해주고 싶은대로 하세요”라고 했단다. 하지만 말로는 그렇게 표현했지만 종갓집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너무 힘들었다고 넌지시 고백한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종갓집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 80대 노부부가 지금은 거의 다 헐고 일부 남아 있는 종갓집 안방과 사랑채를 조용히 지키고 있는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곧 추석명절이 다가오는데, 오는 추석은 어떻게 준비들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들만 셋을 둔 노부부는 이번 추석명절도 간단히 준비할 거라면서 “할머니 계실 때는 차례고, 제사고 다 여기서 지냈지만 이제는 내 손에서 제사도 끝내고 싶다”고 말한다.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종손 며느리 윤 씨는 “둘이 같이 찍어야지”라면서 남편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세월의 풍파에 변모를 피하지 못한 종갓집에서 오직 전용석·윤송자 노부부의 금실만 그대로인 듯하다.
 

고택을 지키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전용석·윤송자 담양전씨 종손부부.

■ 시대의 변화를 거스를 수 없었던 종갓집
집성촌이란 성(姓)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촌락을 말한다. 집성촌이 생긴 이유는 우리나라의 경우 농경이 일찍 발달해 정착생활을 하던 민족이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로부터 우리나라는 거주 단위를 씨족중심으로 살아왔고 공동체 생활을 했다. 상공업이 발전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산업이 농경산업 중심이었기 때문에 항상 노동력이 중요했다. 우리 조상들의 경우 두레, 품앗이, 계 등을 만들어 협동정신을 발휘했는데, 씨족사회였기에 가능했던 관습들이다.

또 하나는 교통과 통신의 문제다. 과거 교통과 통신이 요즘처럼 발전하지 못했던 시절엔 사람들의 시야가 좁았고 타지역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자신의 친족과 격리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고립을 의미했다. 이런 경우 배타적인 타 씨족의 차별을 감수해야 했고, 협동 문화에서도 배제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자신의 집성촌을 떠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 그리고 산업화에 의한 도시화로 인해 집성촌의 개념이 예전보다 많이 퇴색됐다. 이농향도(離農向都) 현상 때문이다. 즉 탈농업사회로 인해 더 이상 농촌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것이고 전 국민의 80~90%가 도시에 살게되면서 집성촌의 의미는 대부분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집성촌의 역사가 그렇듯이 그 옛날 담양전씨 종갓집의 면모는 점점 퇴색해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종갓집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는 마을 곳곳의 내력이 마을을 찾는 이들에게 새로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과 주변 산의 지형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해서 ‘거북이 마을’로 알려진 이곳 주위엔 나지막한 보개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보물이 덮여 있다는 의미의 보개산은 해발 294m 높이로 산 속 계곡들에 숨겨진 전설들과 바위, 그리고 이 마을에서 태어난 수많은 역사 인물들의 면모를 보면 산 이름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거북이 마을은 예로부터 역사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조선 숙종 때 대사성, 형조판서, 대사간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약천 남구만 선생의 생가터(약전 초당)가 있고, 담양전씨 녹생, 기생, 조생 3형제의 위패를 모신 사당 구산사가 옛 종갓집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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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직 2019-09-07 10:08:02
저 대저택을 가질수있다는건 수많은 소작농들의 피와땀을 착취한 산증거이다,좋와보인 다기보다 서민들의 애환을 느낀다.명절때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것도 잘못보이면 불이익을 당하니 아부성 모임이 밑에는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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