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 간직한 홍성읍
상태바
역사의 숨결 간직한 홍성읍
  • 전상진 기자
  • 승인 2009.09.09 1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신의 휴일> 홍성읍

주말 이른 아침, 안개 그윽한 풍경을 맞이하면 첫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설레는 마음이 일렁인다. 무작정 홍성역으로 향한다. 어디로 갈까 망설여지는 찰나, 역 앞에 서서 내가 살고 있는 홍성을 지긋이 바라본다. 아름다운 작은 도시 홍성, 난 이곳을 잘 모른다. 무엇을 보고 듣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아직 아무 것도 모른 채 어디론가 떠나기보다 이 아름다운 작은 도시를 걷고 싶어진다. 어디로 갈까? 새로 한옥으로 단장한 홍성역사를 벗어나 생태공원 역재방죽으로 향한다.
고암리 역재방죽은 지금까지 어떤 문헌에도 기록돼 있지 않던 가시연꽃의 자생 분포지이다. 1996년 가시연꽃 분포조사에서 우연히 발견된 곳으로 현재 이곳의 가시연꽃 군락은 경남 창령의 우포늪을 제외하고는 국내 최대 군락지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농업용저수지로 조성된 역재방죽은 한반도 최북단의 가시연꽃 자생지이자 조류 서식공간으로 이제 생태공원으로 조성되면 우포늪처럼 홍성의 자연생태 명소가 될 것이다.
물오리 가족들이 여유롭게 헤엄치고 철새들이 날아와 잠시 날개를 푸덕이는 곳, 해걸이가 심해 꽃을 보긴 힘들기만 가시연꽃이 피어나는 자연과 사람이 서로 기쁘게 마주하는 곳, 이곳이 역재방죽이라는 축복, 이 동네 사람 아니고는 맛보기 힘들 것이다.
역재방죽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홍성 문화 ․ 예술의 산실인 홍성문화원을 만나게 된다. 홍성문화원은 본래 홍주성내에 있었다. 그러나 1978년 지진 피해로 건물이 부서지고 낡아 이전계획을 세우던 중 홍주성 복원과 맞물려 2005년 6월에 역재방죽 옆으로 신축 이전했다. 전국 최상위 문화원으로 거듭난 홍성문화원은 다른 지역 문화원의 부러움을 사고 있고, 매주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주민들을 찾아간다.
이곳에 들러 홍성의 유래와 문화, 역사를 알고 갈 곳은 마구형 고개를 넘어 우선, 홍성으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상징처럼 우뚝 선 백야 김좌진 장군 동상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1889~1930), 홍성 갈산 행산리에서 태어나 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구국의 영웅. 장군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대해 우리를 꾸짖는 것일까? 내친 김에 홍성 남장리 남산공원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 동상도 찾아봄 직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1879~1944), 홍성 결성 성곡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독립운동가로 불교사상가로 시인으로 살다간 전인적 인간. 선생도 역시 반쪽으로 갈린 이 현실을 아파하진 않을까?

구국의 역사가 곳곳에

이제 홍주의사총으로 발걸음을 총총 옮긴다. 홍주의병들의 숭고한 유해를 모신 곳, 한말 홍주성전투에서 희생한 홍주의병의 넋과 호국정신을 기리는 이곳은 사적 431호로 지정돼 있다. 역사의 아픔을 짊어지고 간 이름 없는 이들, 이들의 나라 사랑에 절로 고개를 숙여진다.
숙연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겨 홍성 재래시장 부근에 가면 주먹코와 두툼한 입술, 기다란 눈으로 아주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대교리석불입상 또는 광경사터 미륵불(충남도지정 문화재자료 160호)을 볼 수 있는데 근엄한 석불보다 오히려 이웃 할아버지와 같이 더 친근하고 정감이 간다. 이런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라고 멈칫하다가 때마침 1일, 6일 장날이 되면 시골 장터의 훈훈한 인정과 왁자지껄한 장꾼들의 넉넉한 인심도 맛볼 수 있으리라.
홍성 재래시장에서 위쪽으로 홍성천가를 따라 걷노라면 낯익기도 낯설기도 한 당간지주를 보게 된다.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마다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이 깃발을 다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보물 538호로 지정된 이 당간지주(홍성동문동당간지주)는 이곳에 고려시대 창건된 광경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폐사돼 터만 남아 있고 인적도 드물지만 몇 몇 문화유산이 남아 옛 영화를 짐작하게 해준다.
아울러 당간지주와 함께 광경사터에 있었던 광경사지삼층석탑(충남도지정 문화재자료 159호)은 지금은 홍성여중 입구에 옮겨져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이 탑을 일본으로 반출하려다 실패하고 이곳에다 방치해버렸다. 일본의 우리 문화유산 약탈의 현실이 분하고 안타깝다. 이 탑은 1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지금은 내법리 용주사에 모신 광경사지석불좌상(충남도지정 문화재자료 161호)도 있으니 시간이 여유롭다면 애써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다시 도로 건너 홍성 대교리로 향한다. 대교리 지명은 대간동과 교동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대교리가 됐고, 교동은 큰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이름을 얻은 듯해 그 현장을 찾아보니 홍주향교(충남도지정 기념물 135호)가 눈에 들어온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으로 지방 고등 교육기관이다. 홍주향교는 고려 말에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기록에는 조선 태조 8년(1408)에 건축, 태조 20년(1420)에 중수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통에 크게 파손된 것을 1924년 대대적인 중수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제사공간인 대성전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나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잠시 숨을 고르고자 머문 대교공원에는 파리장서(巴里長書) 기념비가 눈에 띤다. 파리장서 운동은 1919년 1월 기호유림 대표 지산 김복한 선생(1860~1924) 등 조선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갖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 세계평화회의에 보내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만방에 폭로한 사건이다. 일제의 침략과 조선의 실상을 국제적으로 호소한 파리장서 전문이 기념비에 수록돼 있어 찬찬히 조선 유림들이 애국애족 정신을 음미할 수 있다.

홍성 문화유산답사 1번지, 홍주성

이제 홍성 문화유산 답사 1번지인 홍주성으로 향한다. 홍주성곽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홍주성이나 홍주관아 건물 등은 처음 지어진 연대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홍성군지 등에 조선 초기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과 함께 대대적인 수 ․ 개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소개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홍주성내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홍주성은 본래 길이가 약 1천772m의 성벽으로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만 남아있다. 성내 관아 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조양문(동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 등 현존 유적과 함께 1972년 사적 23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홍성을 찾는 관광객의 첫 발길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홍주성은 역사적으로 동학농민운동, 을미의병, 병오의병 등 항일운동의 1번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홍주성은 성벽이 파손되고 관아 건물들도 사라져버렸다. 또 일제는 항일의병의 기상을 꺾기 위해 홍주관아 내에 일본식 건물을 지어 관아 건물 다수를 파괴했다. 그리고 78년 지진 피해로 그나마 남아 있던 성벽도 훼손됐다. 참으로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성곽이다.
이 아픈 역사를 간직한 홍주성이 복원된다. 성벽은 물론 문루 복원, 관아 건물들이 철저한 고증 아래 복원될 계획이다. 홍주역사기념관도 구 세무서 부지에 들어선다. 군청사도 이전 계획이다. 그러나 복원 관아 건물을 군청사로 활용하는 방안도 복원예산 절감 등의 효과를 고려해 신중히 검토할 만하다.
이제 나른한 오후로 젖어든다. 가까이 있어 보지 못한 아름다운 작은 도시, 홍성을 이제 주말에 알토란하게 짬을 내어 가족과 함께 거니는 것은 어떨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