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이러시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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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이러시면 됩니까?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0.11.05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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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형님 스님이라고 부르겠다고 약속했던 젊은이의 밝은 전화 목소리 뒤로 아침에 출근하는 좋은 직장을 얻었고, 열심히 일해서 두툼한 뱃살을 빼겠다는 반가운 전갈이 왔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긴 여름의 낮이 뜨거운 자취를 거두어들이고 네온 불이 하나 둘 켜지는 어스름한 시각 야외에 펼쳐 놓은 파라솔 아래에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시원한 맥주잔을 부딪치며 땀으로 범벅이 되었던 고단한 하루를 식히고 있는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날씨는 고사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커더란 덩치에 계절을 아랑곳 않는 듯 검은 양복을 입고 짧은 머리를 한 20대의 건장한 청년들이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이럴 때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일부러 모셔와서라도 불교를 가르칠 판인데, 스스로 나를 초청하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언제나 그랬듯이 그렇다고 덥석 앉을 수는 없고 은근히 못이기는 척하면서 합석했다. 자리를 잡고 앉자 난리가 났다. 스님, 이건 술이 아니고 곡주니까 한잔 하세요,라고 하자 형님스님이라고 부르겠다고 약속한 분이 아따 무식하긴 곡주가 아니고 곡차라고 하는 거여를 시작으로 "짜식아! 아무리 그래도 스님을 길거리에서 술을 마시게 하면 쓰것냐!" 등등 한참의 실랑이가 있은 뒤에 스님의 의사에 따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나는 유색음료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 어떤 분의 권유로 사이다를 한 잔 시켰다.

경험으로 볼 때 음료수가 내 앞에 놓여 질 때쯤이면, 자신을 불자(佛子)라고 소개하는 사람과, 절에는 안가지만 불교를 좋아한다는 사람, 그리고 전혀 말이 없거나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로 구별되어진다. 그 날도 어김없이 각자의 종교적 성향에 따른 소개가 끝이 났다.

다행히 나를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내가 이야기를 할 기회는 좀처럼 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불교에 대한 사전지식 마저 부족한 이런 자리에서는 대체적으로 자기 고향에 있는 절이나 자신이 알고 있는 스님을 내가 아는지를 묻고, 자신도 절에서 살고 싶다거나 친구가 스님이 되었다는 등등 의례적인 말에 이어서 어김없이 사주팔자를 묻는 단계로 발전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오고간 몇 마디의 말들은 다소 남아 있던 어색함을 허물고 서로를 소통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이쯤 되면 나는 챔질의 기회를 잡기 위해 물고기의 입질에서 눈을 떼지 않는 낚시꾼처럼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일순간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아야만 한다.

그리고 일단 한번 잡은 기회는 놓치게 되면 또다시 분위기를 만들기는 어렵기 때문에 말의 시작과 동시에 울고 웃기는 코미디언이 되어 그들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 날도 "관상을 보아하니 자네들처럼 엉덩이가 의자에 꽉 끼일 만큼 크고, 가슴이 고릴라 같이 두툼하여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옛날 같으면 장군이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시대를 잘못 만나서…,곰탕집 깍두기가 되어 버렸다"라며 너스레를 떨며 한껏 분위기를 잡았다. 그때 "스님이 이러시면 됩니까?"라며 앙칼지고 격앙된 목소리와 함께 어떤 여자 분이 몹시 흥분된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일순 조용해졌다. 모두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고, 이야기인 즉, 자신은 좀 전에 내가 건네준 포교지를 받았으면서 공부하는 스님이라고 생각되어 포교에 보태라고 보시를 했는데, 스님이 길거리에서 어린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으니 열불(화가 나서)이 나서 따지러 왔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과는 평소부터 친분이 있는 듯 "아따! 누님, 스님은 우리가 모셨고, 지금 법문을 하고 있었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갑자기 이게 뭔 일이란다요" 이어서 다른 사람이 "스님은 음료수 마셨제, 언제 술을 마셨다고 그라요"라고 거들었다. 이번에는 여자 분이 어리둥절해 했고, "누님도 하잘대기 없는 오해 풀고 스님이야기를 들어보소! 겁나게 재미있소!"라며 청년들이 자리를 권하자 멋쩍은 듯 주저거리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자기 생각 속에 갇혀 사는 중생은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해서 괴로움을 만들고,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냄이라는 괴로움을 만든다. 이러한 중생들의 모습을 원효스님은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을 장엄함은 오랜 시간 욕심을 여의고 고행했기 때문이요, 많고 많은 중생들이 불집(괴로움)속에 윤회하는 것은 한량없는 세상에 탐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니라.(중략)."고 말했다.

이처럼 좀 전 까지만 해도 보살님은 스스로의 생각이 만들어낸 '화탕지옥'에 들어갔고, 나찰이 되어 스님을 잡으러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지중한 인연이 있어서 내가 들려주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편해 졌으니, 앞으로 모든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신의 입장[아상]에서 바깥을 분별하는 어리석은 마음은 버리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헤어졌다. 그때의 인연이 전화가 왔으니…,….반가운 마음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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