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벤츠와 욕망의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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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벤츠와 욕망의 심리학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1.12.15 14:5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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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여검사가 벤츠자동차와 샤넬가방을 뇌물로 받아 구속되는 모습을 보며, 사방에서 개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뇌물을 받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행위를 잘못으로 규정해야 할 검사가 오히려 뇌물을 받았으니 그 비판의 목소리는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비리는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앞으로도 없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유독 이 여검사만 벤츠와 샤넬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도 그럴 개연성(蓋然性)이 크다. 뇌물의 대상으로 늘 등장하는 소위 명품 가방, 명품 시계, 명품 옷, 고급 승용차가 지닌 희귀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갖는 다른 심리적 요소들이 그 안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명품이 뭐 길래 다들 갖고 싶어 하는가? 명품은 편리하고 내구성이 있어서 소유욕을 부채질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것은 우리의 ‘욕망의 구체적 대상’이다. 나의 존재를 대중사회에서 드러내줄 표현 방법이기도 하다. 타자에게 나의 존재를 알릴 방법이 마땅치 않을 때 우리는 손쉬운 이 방법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자본주의화 과정에 놓인 중국에서도 명품족들이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Lacan)에 따르면, 욕망은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동력(動力)이다. 내가 저 대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내가 저 사람과 결혼하기만 하면, 내가 저 지위에 오르기만 하면, 내가 얼마만큼의 돈을 벌기만 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은 생각, 이것이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다. 그러나 돈, 권력, 명예, 사랑 등은 손아귀에 잡혀지는 듯한 순간 그것은 손아귀에서 미끌어져 저 앞에 신기루처럼 다시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잡으려고 또 사투를 벌인다. 오직 죽음만이 이러한 욕망을 멈추게 할 수 있단다. 그래서 욕망은 환유연쇄(換喩連鎖)의 형식을 띈다. 욕망이 강해야 개인적으로 이루어내는 업적들도 많아질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욕심이 문제다.

돈, 권력, 명예 등에 초연한 채 살아간다는 것은 라캉의 논리에 따른다면 생중사(生中死)의 상태다. 그렇지 않다면 가짜 도사일 가능성이 높다. 누구든지 돈을 많이 벌려고 하며, 권력과 명예를 누리려고 한다. 보은, 옥천, 영동을 지역구로 하고 있는 현직 5선으로서 팔순을 바라보는 이용희 국회의원은 수없이 당을 옮겨 다니다 얼마 전 자유 선진당에서 민주당으로 또 당적을 옮기고 있다. 이번 당적 이동의 주된 이유는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보도다. 욕심이 하늘을 찌른다. 누구든지 돈이 많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편리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돈은 빌 게이츠나 이건희 같은 재벌들이 지닌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돈이다.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기에도 힘든데 어떻게 밥벌이에초연한 채 살아 갈 수 있겠는가? 칼 맑스도 똑같이 잘 살아보자고 공산주의를 주창했지만 그런 유토피아 세계는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인간의 능력이 모두 다르니 똑같이 잘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치열한 경쟁을 바탕으로 한 승자독식 구조이다. 누구나 게임에서 승리하려고 하며 좋은 물건을 가지려고 한다. 벤츠를 받은 검사는 이런 경쟁 시스템의 승자이다. 사회의 소위 지도층이나 재벌들도 이 시스템의 승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돈, 권력, 명예 모두를 소유하게 되는 시스템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기에 그렇다. 자기들끼리 패거리 지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만의 리그를 벌여서는 공정사회를 이루기 어렵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절제하는 삶이 자신과 사회에 행복을 가져다주고 형이상학적 측면에서도 자신의 참모습을 되찾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많은 분야에서 아직도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은 돈을 받고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거나 수사 중에 있다. 돈과 권력의 끈끈한 유착관계를 잘 보여주는 한 예다. 우리사회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음은 얼마 전 발표된 부패지수가 OECD국가 중 꼴찌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라캉은 인간을 욕망의 환유연쇄에 사로잡힌 존재라고 비관하지만 꼭 삶을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다. 동양적 사고에서 보면 인생의 목표가 100이어도 70-80에서 만족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현실에서 행복하다. 그러기위해서 나를 제어하는 ‘내공’이 필요하다. 즉 자기의 욕심을 누르고 예(禮)로 나아간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정신이다. 사회의 규범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범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과정이다. 불교에서도 끝없이 탐욕의 샘물을 퍼내다가 샘물이 솟는 근원을 보는 것을 견성(見보다 性마음이 태어나는 자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견성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방에 10년을 앉아있어도 무릎만 아프지 견성하기 어렵다고 한다. 욕망의 선긋기가 이렇게 지난(至難)한 일인데 도덕성만 요구해서는 사회가 깨끗해지기 어렵다. 이런 고로 이 사회가 작동하는 시스템이 먼저 개선되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가치체계를 바꾸어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 꼼수를 쓰지 않는 건강한 시대정신(zeitgeist)이 사회 중심에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다.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아도, 벤츠를 타고 씽씽 달려도, 눈여겨보지 않는 내공이 높은 사회가 성숙된 사회다. 적어도 먹고사는 일상사가 해결된다면 어느 정도의 욕망의 선긋기는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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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정 2011-12-23 00:22:16
욕망과 욕심의 차이를 생각해봅니다.
벤츠와 여검사를 읽으면서 어쩌면 그럴수도 있음을...절대로 안된다고 할 수 있는 제어가되수있는 그런 사회분위기가 아니니...그래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욕망의 선긋기가 그리힘이드는데 도덕성만으로는 어림없지요. 윗물은 더한데...라며 냉소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바지랑대 2011-12-15 17:45:27
우리가 사는 사회의 현상과 병리를 언제나 날카롭게 진단하는 김상구 교수님의 글을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갑자기 글을 읽으면서 '욕망과 무덤은 같은 철길 위를 달리는 두 개의 전차 이름'이라는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암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우리 사회가 욕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내공이 높은'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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