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절규’와 어느 허무주의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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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절규’와 어느 허무주의자(?)의 삶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1.12.29 11:3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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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는 김정일, 카다피, 스티브 잡스, 박태준 같은 인물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들의 죽음을 보면서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악명을 날리던 사람이든,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했던 사람이든 실존적 삶의 현실에서는 고뇌하고 방황도 겪었을 것이다. 삶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그가 아니라 ‘마스크’일 뿐이다. 어떠한 인간도 이와 같은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죽음을 전제로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향해 가지만 역설적으로 모두 죽음을 거부한다. 사자의 이빨에 물린 톰슨가젤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사자의 입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치며, 뱀의 입속에 들어간 개구리도 사지를 비틀며 뱀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고 용을 쓴다. 모든 생명체가 이렇게 죽음을 거부하지만 자연의 질서는 죽음을 그 옆에 놓아두고 있다. 인간도 자연의 질서에서 예외일 수 없다. 고등동물일수록 생명에 대한 애착은 더욱 강하다. 죽음을 전제로 태어났기 때문에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태로운 것이 삶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그 어떤 특별한 의미 없이 그저 세상에 ‘내던져진 자’로 정의하면서, 이 ‘내던져짐(Geworfenheit)’에는 거룩한 신의 섭리도, 정해진 운명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을 인간이라 부르지 않고 ‘거기(Da)에 있는 존재(Sein)’ 즉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서만 존재의 의미가 밝혀질 수 있다는 견해다. 그러니 항상 불안과 염려가 뒤따를 수밖에 없단다.

사뮈엘 베케트도 ‘고도를 기다리면서’에서 ‘무의미한 시공간’ 안에 내던져진 대본 없는 배우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이라는 시간에 붙잡혀 있으면서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한없이 기다린다. 그러나 고도가 누구이며, 언제,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자꾸 잊어버린다. 고도가 언제 오는지조차도 모른 채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고도가 누구냐는 질문에 베케트는 내가 알았다면 작품 속에 명시해 놓았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뭉크 '절규'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별이 총총한 어두운 겨울밤 어느 다리 위에서 어딘가를 향해 절망적으로 구원을 외치는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그림 「절규」속의 주인공들이다. 이 세상 절규를 들어주고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저기 뒤에 따라오는 이는 죽음의 사자가 아니던가. 보이는 것은 추운 겨울밤 하늘 먼 곳에서 무심히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뿐이며 들리는 것은 우주의 한없는 침묵뿐. 우주의 별무리 속에는 교통경찰도 없으며 골목길을 안내해 주는 가로등도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서성이며 방황한다. 파스칼도 ‘신 없는 인간’에서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고백한다.

왜 우리는 죽음이라는 제한된 시간 앞에서 권태로워하면서 치사해 보일 정도로 생명에 집착하는가? 조만간 죽는다는 것이 자명한데도, 사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삶이 궁극적으로 허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내일을 걱정하는가?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본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엮어나가는 것은 하이데거의 생각처럼 내가 정할 몫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카다피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김일성 부자는 죽어서도 죽지 않은 듯 유리관 속에서 유훈통치를 한다고 살아있는 시늉을 한다. 하여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의 5막 5장에서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백치의 이야기”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정년을 앞둔 어느 교수는 지난 30년이 잠시 나무그늘 아래서 담배 한 개피 피운 시간과 같은 느낌이라고 귀뜸 한다. 덧없는 것이 세월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어느 역할을 맡든 분명해 보이는 것은 바퀴벌레처럼 번식하며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주체로서 끝까지 나를 확인하면서 수치스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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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랑대 2012-01-10 17:05:59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이 죽음에 대한 원인을 '불안'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 불안에 맞서서 '윤리적 주체로서' 당당히 서기를 원하시는 교수님의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인생의 덧없음을 멋지게 표현하신 어느 노교수님의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거기 내던져진 존재'로서 내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홍민정 2012-01-03 14:45:14
한해의 마지막과 새로운해의 시작에서 칼럼을 봅니다.
뭉크의 절규 이승하교수님 시 작품으로 봤습니다.
한해의 끝에서 내 삶이 치사스럽지 않도록 생각중입니다.
반복되는 하루에서 찾아보려는 의미의 하루...30년의 세월이 잠시
그늘에 담배한개피 피운 시간이라고...삶을 권태해 하지 않고 반복되는
하루 일과에 감사해 합니다.
아침.간식.점심.간식.저녁 챙겨드릴수 있는 시간에 감사하며...
좋은글에 마음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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