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화살’, 폭력의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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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폭력의 아포리아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02.02 10:1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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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영화 한편이 그만큼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다. 70년대 중반 ‘별들의 고향’이라는 영화가 요즘말로 대박이 났을 때 어느 다방의 입구에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경아가 얼어 죽었음’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에어컨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냉방이 잘되고 있다는 주인의 재치 있는 홍보 문구였다. 그만큼 소설과 영화, 연극 같은 예술작품들은 직간접으로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영화 ‘부러진 화살’도 우리 사회에 많은 논쟁을 예고해 놓고 있고, 일부 지방법원에서는 재판이 끝나고 방청객의 의견을 수렴하여 담당판사에게 전달하는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이 영화의 겉 구조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왜 재판부는 변호인의 요구를 반복하여 기각했는지 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다. 고압적이고 문턱이 높다는 이야기다. 개인의 억울함을 정당하고 적법하게 해결해 주어야 할 사법부가 오히려 개인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이 영화를 한번 굴절시켜 볼 수 있다. 사법부라는 국가 장치가 국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한다면 불만을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그 불만이 인위적으로 누가 만들어낸다기보다는 조직 스스로가 불신을 자초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또 벤츠를 받은 여검사와 막말이나 ‘가카새끼’와 같은 비속어를 사용하는 일부 판사들처럼 개별적으로 그 조직이 쌓아온 공든 탑을 스스로 허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그 조직에게도 큰 비극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대법원은 ‘부러진 화살’이 허구에 기초한 영화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보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행위는 영화가 영화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가는 것이다. 영화가 허구라고 생각하지 않고 보게 되면 무슨 큰일이라도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예상되기 때문일까? 사실과 허구를 구분 못하는 관객이 걱정 되어서였을까? 예술이 허구이기는 하지만 거울처럼 현실을 반영한다. 그 거울이 평면거울, 오목거울, 볼록거울일 수 있고, 또 어느 거울을 어떻게 들고 있느냐는 작가의 창조행위와 관련이 된다. 이 영화에서는 싱크로율이 9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하는 것도 영화 속의 자막이니 판단은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영화는 ‘팩트’(사실)가 아니고 ‘픽션’(허구)이야”라고 일부러 알려줄 필요가 없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관객은 판타지 영화를 본다고 느낄 것이고 관객이 동감을 할 때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부러진 화살’의 형식논리와는 달리 이 영화가 우리사회에 의미 있게 시사하는 바는,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와 재판부의 갈등처럼, 개인이 어떤 조직의 부당성에 저항하고 조직은 더 체계적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이다. 모든 가능성의 폭력을 제압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개인으로부터 복수할 수 있는 권한을 몰수 해버렸기 때문에 국가가 개인에게 계획적 폭력을 행사할 경우, 개인은 무방비 상태에 이를 수밖에 없다. 아니면 석궁을 들고 조직을 향해 쏴야만 하는가의 문제이다. 또는 간디처럼 ‘비폭력’(nonviolence)이나 새로운 개념 ‘반폭력’(anti-violence)을 외쳐야만 하느냐의 문제이다.

알바니아의 작가 이스마엘 카다레(ISMAIL KADARE)의 소설이자 영화화 되었던 ‘부서진 사월’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설 때 폭력의 ‘아포리아’(해결할 수 없는 문제, 막다른 골목)를 보여준다. 알바니아의 산악지대에서 행해지던 카눈(kanun)이라는 관습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형식으로 피해자 측은 가해자 측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카눈에 따라 보복 살인을 해야 하는 ‘그조르그’라는 주인공은 여러 번의 매복을 통해 살인을 완수 한다. 그러나 상대방을 살해하면 그도 상대방으로부터 살인을 당해야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끝없는 복수가 자행되며 70여년동안 40명이상이 복수의 대상으로 총칼에 쓰러진다. 그 산악마을에서는 ‘살인하지마라’가 아니라 ‘살인하라’이다.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피의 회수’를 통해 무의미한 대량학살과 맹목적인 살인에 비해 카눈이 유의미 할 수 있다는 패러독스를 보여주고 있다. 살해한 자는 반드시 살해 된다는 복수의 비극이다. 카다레는 카눈이 겉으로는 매우 잔인하게 보이지만 어느 헌법보다도 공평하다고 주장한다. ‘피에는 피’라는 원칙이 적용되는 그곳에서는 함부로 유혈사태를 벌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영화 ‘부러진 화살’도 김명호가 자신의 억울함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처리되지 못했다고 사법부에 화살을 겨눈 것이다. 부러진 화살이 겨눈 곳은 판사 개인이 아니라 제대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국가장치의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의 복수는 끝없는 폭력의 아포리아를 만들어내지만 복수가 없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이다. 합법화되고 정당화된 법치가 힘 있고 강한자의 편에 서서 강한 조직을 대변할 때, 개인은 자신이 흘린 피를 회수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약한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피를 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복수는 자신이 흘린 피를 다른 사람의 피로 회수하는 것이다. 복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복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는 타락할 수밖에 없다. 사법부라는 국가장치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사회는 비극의 톱니바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스마엘 카다레는 이소설의 끝에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이 불행한 산악지방 주민들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기는커녕 관객이 되어 그들을 구경하고 재미있는 소재를 찾고 있소. 한 민족 전체를 피비린내 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몰아넣고는, 당신은 귀부인들과 함께 박스 좌석에서 그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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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랑대 2012-02-07 12:23:33
세익스피어의 희극 'Measure for Measure'는 법률을 선고하는 자(안젤로)의 타락한 인간상이 주된 줄거리입니다. 스스로 최고의 엘리트 코스만 걸어왔다는 자만과 오만으로 똘똘뭉친 사법부라면 당연히 모든 일에 자기 중심적 태도만을 보여줄 것입니다. 아무쪼록 교수님의 바램대로 우리나라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복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치국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김정애 2012-02-05 15:45:58
영화가 준 감동보다 교수님의 글이 더 감명깊네요. .... 그러니 이 세상을 어찌 하면 좋은가요?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 피눈물 난다는 원리를 알고 있기에 , 죄가, 세상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럼에도 ... 살아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가난해질수록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 지는 자유가 있어 그나마 견딥니다. 세상의 정의를 위하여, 소박한 행보지만, 더욱 좋은 글로 자극을 주시길 바랍니다.

홍민정 2012-02-03 00:04:58
역사는 잡은자에 의해 쓰여지기에 그 시선으로는 그렇게 볼수 밖에 없고
또한 불합리할수록 더 강압적인 정당화...
아직 영화를 못지 못했지만 빠른시일내에 보려고 합니다.
교수님글에 새롭게 인지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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