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어느 멋진 겨울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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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어느 멋진 겨울 날에
  • 이성은 청소년동반자
  • 승인 2020.02.2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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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광천 센터 출발, 며칠 겨울비가 오더니 미세먼지는 조금 씻겨내려 간 듯하다. 목적지는 홍성 맥도날드, 학기 중엔 학교에서 상담을 했었는데 방학이라 거의 집에서만 지내고 있는 한 아이와 12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을 힘들어하는 아이는 학기 중엔 시도 때도 없이 문자나 전화를 하더니, 방학이 시작되자 다소 편안해졌는지 귀찮아하는 말투와 표정이 역력하다. 자동주문기 사용에 서툴러 어리바리하게 구는 나를 창피해하며, 카드 결제까지 시간이 왜 그렇게 많이 걸리는지 타박이다. 평소 우울증으로 에너지가 없는데다 스트레스로 늘 복통에 시달려 먹는 걸 좋아하는 않는 아이가 그래도 오늘은 내가 사 준 행운버거세트를 다 먹었다. 집 근처라서 이곳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었는데, 이렇게 잘 먹을 줄 알았으면 제대로 된 밥을 사줄 걸 그랬다.

다음 상담은 홍북읍 주민복합지원센터 내포출장소 2층에 위치한 내포거점상담실에서 오후 2시에 예정돼 있어 서둘러 이동을 시작한다. 그곳엔 누군가 상주하고 있는 곳이 아니어서 내담자가 오기 전 먼저 도착해 주변 환경을 정리해야 한다. 상담실에 도착해서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면서, 내포 지역 찾아가는 상담 장소가 마땅치 않아 카페를 전전하던 때가 떠오르며 문득 감사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왠지 불안하다. 분명 어제 오후 늦게 약속 확인 차 통화를 했건만, 오늘 오전 중엔 여러 번 계속된 전화, 문자, 카톡에도 반응이 없다. 지난 회기 이 내담자에게 바람을 맞은 적이 있는 터라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시간 10분, 2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는다. 그래도 3시에 이곳에서 다른 상담이 또 있기에, 그동안 찾아가는 상담을 하느라 미처 하지 못했던 행정업무를 조금이라도 처리하고자 컴퓨터와 무선주전자 전원을 켜면서 덜 억울해하려고 노력한다. 

오후 3시 50분 내포신도시를 출발, 아까 네비게이션 앱으로 검색해보니 장곡면 소재 지역아동센터까지 30분 정도 소요되는 듯 했다. 내포에서 장곡으로 이동하는 것은 처음이어서 홍동을 거쳐 장곡으로 이어지는 시골길이 매우 낯설다. 그곳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초등학생 두 명이다. 이미 장시간 이동과 상담으로 인해 다소 피곤한 상태이지만, 상담선생님 만나기를 기다리는 해맑은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니 지쳤던 마음에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이 느껴진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니 5시 30분, 업무 종료 시간까지 30분 남았다. 남은 시간이 참 애매해 지역아동센터에 좀 더 머무르다 바로 퇴근할까 생각도 했지만, 일찍 어두워지는 겨울 시골길로 퇴근하느니 10분 정도 걸리는 우리 센터로 잠시 들러 오늘 일과를 마무리하고 숨 좀 돌리다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생각하니 본래 찾아가는 상담이 주 업무인 나로서는 이동이 많은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오늘과 같이 큰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아온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던 것 같다. 십 수 년의 경력단절을 끝내고 재취업의 기회를 준 새 직장에 입사해 약 반 년 정도 면허도 차도 없이 버스를 타고 다녔던 때가 생각난다. 서울, 수도권도 아니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찾아가는 상담을 하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당시 아침마다 출근을 시키고 때로는 상담 장소로의 이동을 도왔던 남편, 퇴근길에 자신의 차를 태워주던 직장 동료들 모두에게 고마운 생각이 든다.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 마음이 뿌듯하다. 


이성은<청소년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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