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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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30
  • 한지윤
  • 승인 2020.02.2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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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윤의 청소년 역사교육소설

“그럼 살아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나요?”
행여나 해서 지달이 물으니까,
“아 그래, 수백 명 군사가 온 마을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지랄을 했는데 어느 장사가 살아나왔겠어요. 붙들려 간 젊은 여자들만 결국 살아남은 셈이죠?”
“그 원수 놈들이 그런 만행을 하고 간지 이틀만에야 우리편 군사가 와서 죽은 시체를 찾아 매장해 주고 갔지요. 죽은 후문상격으로…… 원 참, 쯧쯧…… 우리 마을도 비리마을이 그런 참혹한 변을 당한 후로는 하루도 마음을 못 놓습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추연한 거동으로 되돌아서 버린다.
지달은 행여나 하던 한 오라기 기대도 완전히 꺾여 버린 채, 넋을 잃고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아버렸다.
“이 일을 어쩌나, 이 일을 어째……”
아무리 생각해고 생각해봐도 원통한 일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무지한 적군에게 붙잡혀가서 농락을 당할 노화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노화를 구해내자!”
순간,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지달은 아까 농부가 일러 주던 고구려 군사가 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달픈 다리를 질질 끌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배가 고프면 가을이라 들판에 널려 있는 곡식들을 주워 먹고, 잠이 오면 산골 아무데서나 누워 자곤 했다.

낮이고 밤이고 기력이 있으면 걸음을 재촉했다.
국경을 넘어 고구려 땅에 들어선 지달은 군사들이 주둔해 있는 곳만 찾아다녔다.
“백제 비리마을을 공격해서 대공을 세운 군사들이 어디 주준해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대개 그 주둔지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건 왜 묻소?”
하고 되묻기 마련이었다. 행여 백제나 신라의 첩자가 아닌가해서였다.
그만큼 그 당시의 삼국 접경지대는 인심이 날카로웠다.
이곳저곳 아무리 수소문해 다녀도 비리마을을 습격한 군사의 주둔지는 좀처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기습은 엄격한 비밀리에 행해지는데, 더군다나 군사의 주둔지까지 일반 백성들이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두 달을 두고 괴로운 방황이 계속되었다. 어느새, 가을도 다지나가고 차가운 겨울이 왔다.
어느 날 지달은 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그만 길가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깊은 산골의 인기척조차 없는 후미진 곳이었다.
한참이 흘렀을까, 지달이 언뜻 눈을 떠보니 뜻밖에도 자신이 네모반듯한 조촐한 방에 누워있었다.
“쟁그렁, 쟁그렁”
바람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풍경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절이구나……”
지달은 비로소 자기가 절방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지달은 벌떡 일어났다. 심한 허기 때문에 눈 앞이 팽그르르 돌았다.
“총각이 깨어났구려.”
문소리와 함께 점잖은 음성이 들려왔다.

눈을 들어 보니, 얼굴에 주름이 잔뜩 잡힌 늙은 스님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지달이 일어서려니 극구 말리며 누워 있으라고 권했다.
비록 주름살이 많은 얼굴이지만 그 모습이 마치 부처님마냥 자비해 보였다.
“스님께서는 저를 죽음에서 건져 주신 은인이십니다.”
지달은 힘없는 소리로 인사를 드렸다.
하여튼 인사부터 올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지친 그의 머릿속에서나마 스쳐가기 때문이다.
“그렇소. 나는 총각을 다시 살린 은인이요. 마을에 갔다 오다가 길가에 쓰러져있는 총각을 발견하여 여기까지 업고 와서 의식이 되돌아오게 약을 썼소. 그러니 나는 총각의 재생지은인(再生之恩人)이요.”
조금도 사양 없이 자기가 은인이라고 지칭하지만, 지달은 그 스님에게서 이상하게도 뽐내는 기색이나 오만을 느낄 수 없었다.
도리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더 할 수 없는 성스러움 같았다.
말을 다 하고나자 스님은 밖으로 나가더니 이내 더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흰 쌀밥을 한 상 차려 오는 것이었다.
“자아, 또 내가 총각에게 은혜를 베푸오.”
스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달은 덥석 밥상을 안을 듯이 끌어당겼다.
아ㅡ 밥을 본지도 몇 날이나 되었는가.
병영을 도망친 후로는 밥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한 지달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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