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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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59
  • 한지윤
  • 승인 2020.09.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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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그 중은 왕 앞에 와서 엎드려 절을 하고는,
“대사는 어디서 오신 분이며 존함은 어떻게 쓰시지요?” 
“황공하오이다. 스승은 도림이라 하는 고구려 사람이온데 대왕께서 인후하여 백제 나라 백성들이 편히 산다는 소문을 듣고 건너온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왕께서 바둑 명수를 부르신다기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바둑은 잘 두시오?”
“네! 중의 몸으로 불도에는 밝지 못하나 바둑만은 잘 배워두었습니다.”
도림이라는 그 중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왕은 얼른 바둑판을 가져오게 하여 도림과 마주앉았다.
한판, 두판…… 치열한 쟁탈 끝에 서로 승부가 있었으나 개로왕은 번번이 비지땀을 흘렸다. 한두판 이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도림이 일부러 수를 늦춰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국수(國手)로다!”
개로왕은 고림의 바둑솜씨에 감탄한 나머지 그를 상빈으로 대접하여 큰 잔치까지 베풀었다.
“대사, 과인이 오래전부터 대사와 같은 국수를 만나려고 원했더니 이제야 소원성취하였소. 다만 늦게 만난 것을 통탄할 뿐이요.”
“황공하오이다. 신은 이국에 태어나서 알아주는 이도 없이 쓸쓸히 지내던 차 이제 대왕처럼 인후한 임금을 만나게 되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왕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고 도림은 왕의 은덕에 감읍하여 재삼 약사발을 부어올렸다. 이리하여 이날부터 개로왕과 도림은 틈만 있으면 바둑판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게 되었으며, 도림에 대한 왕의 신임과 친분도 나날이 두터워지게 되었다.
‘바둑임금’은 차츰 도림을 신하라기보다도 오히려 ‘바둑친구’로 대해주었다. 그리하여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도림이 아뢰는 일이면 왕은 거의 다 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도림은 정색하고 말을 꺼냈다.
“신이 한 가지 정중히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요?”
“신이 대왕의 하해같은 은총을 받고 여태까지 보답하지 못해 황공하옵기 그지없습니다. 이제 대왕과 백제를 위해 한가지 아뢰지 않을 수 없사온데 대왕의 의사가 어떠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서 말하오.”
임금이 궁금한 듯 재촉하자 도림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였다.
“대왕께선 어찌하여 궁궐을 크게 짓지 않습니까? 궁궐이 크고 화려해야 신하들과 백성들이 우선 그 임금을 우러러보고 왕권이 서는 것입니다.”
“음, 더 이를데 있는 말인가?”
“그리고 지금 선왕들의 능묘도 허술하여 해골이 드러날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된 일이옵니까? 왕권을 튼튼히 하자면 선대 임금들의 능묘도 호화롭게 수리해야 할 줄 압니다.”
“역시 지당한 말인걸.”
개로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도림은 신이 나서 주어붙였다.
“백제로 말하면 사방이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실로 하늘의 덕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의 힘을 빈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응당 성세한 기세와 호화로운 차림으로 남들이 보기에 무섭도록 하여야 하늘의 힘과 사람의 힘을 다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옳은 말이요. 과인도 진작 그렇게 생각은 하였으나……”
도림의 말을 듣고 난 왕은 이렇게 말끝을 흐려버렸다. 그러자 도림은 왕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대왕께서 진작 그렇게 생각하셨다면서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역사를 크게 벌리면 신하들이 말썽을 부리고 또 백성들이 아우성칠 것이 아니요?”
왕의 말을 듣고 도림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대왕, 신하들의 말썽이나 백성들의 아우성은 한 때의 일이지만 나라의 대사는 천년지계, 만년지계올시다. 대왕께서 나라를 위해 하시는 일에 반대하는 자는 곧 나라의 죄인입니다. 그런건 꺼릴 것 없습니다.”
불처럼 뜨겁고 꿀처럼 달콤한 도림의 말은 대뜸 개로왕의 폐부를 찔렀다.
“대사의 말이 가상하오. 암, 옳구말구!”
왕은 드디어 온 나라 안에서 인부를 뽑아 큰 역사를 벌렸다. 높고 긴 성을 쌓고 으리으리한 궁전을 짓고 어느 구석이든지 황금빛이 번뜩거리게 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인부들을 보내 골을 실어다 선왕의 능묘도 성장으로 꾸미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국고는 마를대로 말라 나중에는 갖은 명목으로 백성들이 재산을 거두어들이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백성들의 원성은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놈의 세상이란 말인가?”
“이놈의 세상에서 못살겠다!”
신하들도 그 이상 참을 수 없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서 역사를 중지하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고 있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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