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한 보물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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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한 보물 ②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04.0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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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호에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은 비옥한 농토와 풍요로운 바다와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쌀(농산물)이 대부분의 국가조세를 차지하던 농경사회에서는 비옥한 농토는 경제이자 권력이었기 때문이다.>라고 글을 마쳤다.

이것은 촌락구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주거지를 선택할 때는 대체적으로 배산임수라 하여 세 방향이 산으로 막히고, 앞이 탁 트이면서 경작지와 이어지는 구릉지를 선호한다. 이러한 곳은 식량과 식수의 공급이 원활하고, 삼면으로 둘러싸인 산이 심리적 안정감과 겨울철 바람을 막아주며, 농경지이용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위를 기본으로 하여 동네가 형성되는데 있어서 한곳에 집중되는 집촌(集村)과 흩어져 있는 산촌(散村)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나라는 주 농산물인 벼농사에 있어서 관계용수를 공급하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서로 협동해야 할 일이 많으므로 집촌이 형성되고, 비교적 개인(가족)의 노동력이 감당할 수 있는 곳에서는 산촌을 이룬다고 한다. 홍성지역 대부분의 마을들이 산촌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은 다른 지역보다 농사일이 쉬웠고 그만큼 효율적이었음을 말한다.

홍성지역은 농업 외에도 어업과 외래 문물을 받아들였던 항구가 발달하였다. 고래로부터 중국의 문물이 수입되는 교역로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특성과 함께『한국수산지』에 따르면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옹암포는 이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로서 광천· 결성 및 서해안의 산물이 집산되었으며, 일본 어선들도 출입했다고 한다. 주요 이입물품은 포목·석유·도기·토기·어류·잡화 등이었고, 이출품은 콩·잡곡·쌀 등이었으며, 어선과 상선들이 오천항에 대기했다가 밀물에 맞추어 옹암포로 들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결성관할의 성호리는 상업항 및 어창이었고, 수산물과 면포를 취급했으며, 100호정도가 여기에 종사했다고 한다.

이러한 경제활동과 농산물의 생산은 많은 인재를 길러 낼 수 있는 자본과 정치적 힘이 되었으며, 태고보우가 국사(國師)가 되면서 목(牧)으로 승격된 홍주는 600여 년 동안 충정도의 정치·행정 중심이 되어왔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은 어려운 환경에서 큰 인물이 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재를 길러내고 정치적 역량을 키우는 데는 많은 시간과 자본이 투자됨을 말한다.

최근묵 교수는 이러한 홍성의 특성에 대해서 다른 지역은 한 두 개의 큰 문중을 중심으로 고장의 질서가 유지되어온 반면, 홍성은 과갈(瓜葛)사회 즉, 오이와 칡넝쿨의 줄기 하나를 당기면 넝쿨전체가 따라 나오듯 고만 고만한 집안들이 서로 연관을 맺고 치열한 경쟁을 펼쳐온 매우 역동적인 사회였다고 분석했다.

농업·어업·교역·정치·행정의 중심이었던 홍성은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농촌사회가 그러했듯이 산업화 이후 모든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자치단체로 전락하였다. 기회의 상실이란 경제력을 잃어버림으로서 교육·정치 등 사회전반에서 소외됨을 말한다.

이러한 산업화 과정에서의 농촌의 궁핍은 결국 저임금 경제성장정책에 기인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국가가 정책적으로 도시산업화를 위해 농촌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농촌인구를 도시로 이동시켜 저임금을 유도하고 상대적으로 기업들은 손쉽게 자본을 축적하는 구조를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서해안의 대규모 간척사업은 농지를 확보하려는 농업정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대규모 토목건설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기업논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본격적인 간척사업이후 서해안의 어업활동의 위축과 어족자원의 고갈은 바다경제를 빈사상태에 이르게 한 것은 기업논리의 폐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했던 사람들이 대안으로 선택한 축산은 현재 홍성경제의 중요한 축이 되었고, 농업은 풀무학교 등의 선구적 노력으로 여러 방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투자와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 있다고 본다.

농촌의 경제력 상실은 자녀들의 교육기회의 박탈로 이어지고, 결국 지역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정치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젊은 층들은 도시로 나가고 자녀들을 외지로 유학을 보냈다. 이 같은 현상은 군내에서도 심각하여 광천읍의 젊은이들이 홍성읍으로 이동하면서 현재 광천읍내에 위치한 초등학교들도 1학년 입학생이 거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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