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한 보물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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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한 보물 ③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2.05.0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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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두 번에 걸쳐 다소 산만하지만 홍성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비옥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많은 인재를 길러 내었고 내포의 중심이 되었음을 살펴보면서 현재의 문제점들도 함께 짚어보았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전은 마치 모바일을 사용하는 손자와 그렇지 않는 할머니의 관계처럼 행복이라는 측면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것은 인류의 선택이었으며, 우리는 서구에 비해서 짧은 시간동안 급격히 산업사회로 진입한 만큼 후유증도 크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후유증만큼이나 여기에 대한 반동 역시 크게 일어 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진화하고 다변화된다 하더라도 의·식·주는 삶의 기본이며, 힘든 농사일을 소리(음악)로 풀어내듯이 문화라고 하는 정신활동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의식주와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이를 전재로 ‘의식주’와 정신문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홍성의 농업은 특정소비층을 겨냥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유기농은 생산보다는 소비에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의 음식은 재료(유기농)를 먹는 것이 아니라 양념을 먹는다. 다시 말하면 재료의 선별보다는 양념으로 어떻게 버무리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념 맛이 좌우하는 음식문화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고리가 튼튼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농가와 도시의 몇 가구가 연계하여 농사는 물론 여가생활의 거점이 되도록 하는 체험적 유기농이 된다면 소비와 신뢰를 함께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법안의 정비가 필요하겠지만 축산역시 폐수와 오물을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은 국가가 책임지고, 개인들은 효소 등을 이용하여 냄새를 줄이는 노력을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다음은 정신문화의 문제이다. 인물이 많다고는 하지만 회덕의 송시열, 안동의 퇴계 이황 등과 같이 시대 전반을 좌우했던 인물들이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학문적으로 본다면 남당 한원진이 있고, 홍주가 목으로 승격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태고 보우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라는 면에서는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지만 현재로서는 어려운 실정에 있다.

따라서 남당의 위정척사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새롭게 해석하고 인간의 본연지성을 어떻게 발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인 삼층설의 성(性)이론을 현대적 의미의 인간성회복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께 묶어 내어야만 말로만 무성하는 인물의 고장이 아니라 실재로 미래사회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존명배청(尊明排淸)식 위정척사는 문제가 있지만 문화자존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양한 문화교류와 해방 이후 전통문화말살 정책으로 정체성이 불분명해지고 있는 현재로서는 매우 중요하며, 이것은 민족의 정체성이 수반되어야 하는 통일논의에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나라가 독립을 했다고는 하나 일본에게 직접 항복문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미국(연합군)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직도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홍성의 한용운·김좌진·윤봉길은 조선독립의 전부이며, 이들의 정신을 통일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시대 순으로 정리해 보면 독립운동에 가장 큰 획인 3·1운동은 지도부의 변절로 사실상 지도부가 없는 순수 민중운동이었다고 본다. 따라서 3·1운동정신은 변절하지 않은 유일한 지도자인 한용운을 통해 계승되었으며, 그의 민족자존주의의 해방운동은 당시 제국주의의 약육강식을 정당화시켰던 사회진화론에 대응했고, 현재 신자유주의 물결에 민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대안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이어지는 김좌진의 청산리전투와 독립운동은 일본의 주력부대인 관동군을 무력화 시켰다는 점에서 2차 대전의 승리의 원인으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며, 노비해방의 인간애는 자본계급화로 치닫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 해결에 단초가 된다고 본다.

그리고 윤봉길의 의거는 국제사회에서 조선독립을 인정하는 유일무이한 문건인 카이로선언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의 의거에 감화를 받은 장개석은 김구를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카이로선언에서 바다 밑 암초까지 자신들의 영토를 편입시키면서도 한반도의 독립을 주장했다.

살펴보았듯이 홍성은 독립 운동가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향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을 한곳으로 묶지 못하고 소홀히 한 결과 소문만 무성한 잔치집 꼴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정보의 교환과 비교를 자유롭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굳이 과거사청산을 말하지 않더라도 민중들은 홍성이 길러낸 정신으로 회귀할 것이며, 홍성은 지금부터 이것을 담아 낼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개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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