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강에는 낙화암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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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는 낙화암 -75
  • 한지윤
  • 승인 2021.01.2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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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닥치시오. 정 그렇다면 우리는 백제를 치기 전에 우선 당나라 군사들과 부득이 일전을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소.”
그 때 김유신 장군은 어찌나 노하였던지 충혈된 눈에 독기가 가득 서려 있었으며, 칼집에서는 칼이 저절로 한 자나 되게 불끈 솟아오르고 있었다. 여태까지 신라를 작은 나라라고 안중에도 넣지 않았던 소정방은 김유신 장군의 서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제가 아직 망하지도 않았고 게다가 북쪽에는 고구려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한 신라와 틀러진다는 것은 당나라로서도 안 될 일이었고 소정방으로 보아도 김유신 장군과 틀어진다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허, 허, 장군! 너무 노여워하시지 마시고 이제 노여움을 거두시오. 아까는 순간적으로 잠깐 격해서 한 처사이니 개의치 마시고 노여움이나 바로 거두시오.”
소정방은 마침내 밝은 얼굴을 지어보이면서 곧바로 김문영 장군을 풀어 놓아주었다.
“그렇다면 됐소. 소장도 일시 격해서 한 말이니 장군께서도 개의치 마시고 언짢은 기분이면 푸시오.”
그제서야 김유신은 소정방과 마주앉아 작전을 토의하였다. 소정방은 겨자라도 삼킨 듯 씁쓸한 표정으로 김유신을 훔쳐보면서 속으로 생각하였다.
‘앞으로 이 김유신 때문에 골치가 아프겠는걸!’
소정방은 이 때부터 앞으로 일어날 수 있을 일들을 예견하면서 벌써 김유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 밖 30리 지점에 진을 쳤다는 급보가 들어오자 의자왕은 허둥지둥 태자와 함께 사비성을 나와 곰나루 성을 향해 황급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대왕께서 우리를 버리고 가신다!”
“이제 적들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대왕께서 혼자 살려고 도망을 가신다!”
왕과 태자 일행이 성문을 나서자 백성들의 아우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중에서도 3천 궁녀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더욱 처량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더욱 웅성거림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저 3천 궁녀는 어떡하라고 그냥 두고 가느냐고 소리치기도 하고 ‘저 궁녀들을 모두 데리고 가야지’하는 비웃음 섞인 소함소리도 들렸다.
이제는 백성들의 원성에 의자왕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궁녀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백성들의 원성소리를 들은 의자왕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3천 궁녀를 전부 데리고 가라고 하였다.
왕은 태자와 함께 눈물에 얼룩진 3천 명의 궁녀들을 데리고 황급히 곰나루 성으로 도망해야만 했다.
이 때 셋째 왕자인 융은 소정방과 김유신 사이에 알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소정방을 끌어당기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자초의 생각대로 맛좋은 음식과 술 그리고 숱한 금백과 함께 글을 보내어 소정방에게 퇴병해 줄 것을 간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애원의 글을 보냈다.
‘당나라와 백제는 물 하나 사이 둔 이웃으로서 사이좋게 지내온 지 수십 년이 되지만 신라의 쥐새끼 같은 것들이 작간하여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군사를 거두고 돌아가신다면 그처럼 다행한 일이 없을 줄 압니다……’
이런 글을 읽는 소정방은 껄껄 웃으며 백제의 사신에게 말하였다.
“백제는 벌써 임금이 없는 나라가 되었단 말인가? 우리 군중에 술과 고기는 얼마든지 있고 금백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백제왕더러 딴 생각 말고 어서 나와 항복하라고 하라!”
백제 사신은 돌아와서 둘째 왕자 태와 셋째 왕자 융에게 그대로 아뢰었다.
“소정방이 퇴병할 뜻이 전혀 없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왕자 융은 퇴병지계가 실패하자 눈앞이 캄캄하였다.
“모두 다 짧은 생각이었지, 되지도 않을 소리! 대왕과 태자는 이미 곰나루성에 가서 정사를 불문하고 너의 계책도 실패하였으니 이젠 사비성을 죽기살고 지킬 뿐이다. 나라 안에는 임금이 하루도 없어선 안 될 것이니 이제부터 내가 임금이 되는 것이다.”
둘째 왕자 태는 이렇게 말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사비성을 끝까지 지키려하였다.
7월 13일, 사비성에 대한 나당연합군의 총공격은 드디어 막을 올렸다. 신라 군사들과 당나라 군사들은 성을 포위하고 노한 짐승마냥 달려들었다. 사비성 군민들은 살을 날리며 돌을 굴리며 결사적으로 싸웠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결전에 나선 사비성 군민들이었던지라 그들의 완강한 반항에 부딪친 적군은 수적으로는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였어도 쉽사리 성을 깨뜨릴 수 없었다. 적들의 첫 번째 공격은 마침내 좌절되었다. 이렇게 되자 스스로 임금이 된 왕자 태는 잠시 콧대가 우뚝하게 되었으나, 셋째 왕자 융과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는 되려 겁이 벌컥 났다.
이에 문사는 숙부인 셋째 왕자 융을 찾아가 조용히 말하였다.
“지금 대왕과 태자께서 엄연히 생존해계신데 둘째 숙부께서 스스로 임금이 되었으니 만일 나당군사들이 물러가는 날이면 우리 모두 역적으로 몰리게 될 게 아닙니까?”
“네 말이 옳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왕자 융도 그 말에는 가슴이 철렁하였다.
“일찌감치 나가서 항복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네 말이 옳다!”
이리하여 그들 두 사람은 그날 밤 은밀히 성문을 열고 나가 적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셋째 왕자께서 성을 나가 항복했소!”
“왕손 문사도 항복했소.”
뜻하지 않은 일 때문에 사비성의 인심은 또 흉흉해지게 되었다.
“가려거든 곰나루성으로 갈 것이지, 에익!”
왕자 태는 노기등등하여 펄펄 뛰었다.
적들은 다시 공격해왔다.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태는 성내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지휘하여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싸움은 점점 불리해갔다.
마침내 성문이 부서지면서 적군이 물밀 듯이 몰려들어왔다.

어느새 성루 위에는 당군과 신라군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아, 이젠 백제는 영영 망하는구나!’
왕자 태는 땅이 꺼지게 탄식하면서 스스로 칼날을 목에 걸었으나 어디서 달려왔는지 적의 군사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별로 반항도 하지 않고 곱게 잡혀갔다. 불길이 충천하는 사비성은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로 들끓었으며 붉은 피가 흘러 강을 이루었다……
“사비성이 떨어졌소!”
“왕자들과 왕손이 모두 항복했소!”
불행한 소식은 이어 곰나루성으로 전해왔다. 의자왕과 태자 효는 김빠진 고무풍선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반나절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지난날 나라의 주인이라고 천하를 호령하던 임금이었다. 그러나 의자왕이 거느리고 온 3천 궁녀들은 이 불행한 소식을 듣고 저마다 얼굴을 싸쥐고 통곡하였다. 지난날엔 임금의 노리개로 사람대접도 못 받던 궁녀들이었다.
“이제 이 지경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의자왕은 점심 무렵이 지나서 태자에게 물었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으니 우리도 곱게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태자는 울상을 해가지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와서 잡아가기를 기다릴 것 없이 제 발로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리하여 의자왕과 태자는 사비성에 돌아와 적장 앞에 엎드려 항복을 드렸으니 이것은 660년 7월 18일의 일이었다.

원한의 낙화암! 그 비장한 화폭

의자왕과 태자가 사비성에 돌아와 적의 장수 앞에 엎드려 항복을 하는 순간 의자왕이 거느렸던 3천 궁녀의 탄식과 통곡은 곰나루성은 물론 불길로 휩싸여 백성들의 아우성과 통곡의 소리로 들끓는 사비성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때는 의자왕의 노리개로 또 어느 때는 왕의 술타령에 시중을 들며 왕의 품에도 안겨 보았던 그들이었건만, 이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픈 마음이야 오죽하랴만……
궁성의 정문이 무너지고 군창에 쌓여있던 쌀을 적군에게 넘겨주어선 안 된다는 왕명에 따라 불을 질러 군창에 있던 쌀이 타는 연기는 시커멓게 솟아올라 3천 궁녀의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남은 궁녀들은 눈물을 뿌리며 부소산(扶蘇山)으로 올라갔다.
부소산으로 올라간 궁녀들은 앞을 보라 보았다. 앞에는 시퍼런 강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백마강의 푸른 물이었다. 그렇지만 궁녀들의 눈에는 푸른 물이 아니고 핏빛 물로 보였다.
치열한 싸움이 할퀴고 지나간 뒤, 백제의 장수와 군수들이 흘리고 쓰러진 피가 이곳 강물로 흘러들어 강물전체가 붉게 보였다.
‘붉은 핏빛……’
궁녀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
“대왕께서 항복하셨대.”
“이제 적군이 곰나루성으로 쳐들어온대.”
“대왕께서 항복하신 마당에 우리가 살아서 무엇해.”
“산다고 해도 더러운 적군의 손에 몸을 더럽힐 바에야……”
궁녀들은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껴 울었다.

백제의 마지막 울음소리는 강물에 부딪쳐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듯 한 절벽, 뒤에는 적군의 손아귀에 든 그리운 도성이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곳, 그 밑에는 짐승처럼 날뛰는 백마강의 검붉은 물결ㅡ.
이제 우리의 갈 곳은 더 이상 없다.
궁녀들은 서로가 서로를 가슴으로 부둥켜안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만이 감돌뿐이었다.
“적군에게 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다!”
“그대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우리가 살아서 무엇해!”
“맞아. 적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우리의 길이야!”
궁녀들은 이구동성으로 살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 때, 한 궁녀가 외쳤다.
“그래, 우리 적군에게 잡혀 몸을 더럽히며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죽자!”
이렇게 외치고는 말없이 흐르는 무심한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살아서 남의 종이 되느니 죽어서라도 백제의 귀신이 되자!”
또 한 궁녀가 치마를 뒤집어쓰더니 절벽에 몸을 던졌다.
“옳다. 옳아.”
“백제여! 나의 사랑하는 백제여!”
뒤이어 또 다른 궁녀가 검붉은 강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백제의 귀신이 되자!”
“그래, 우리 차라리 죽어서 백제의 귀신이 되자!”
3천 궁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절벽을 향해 뛰어 내렸다.

꽃 같은 궁녀들은 앞을 다투어 강물을 향해 몸을 날렸고, 어느덧 백마강의 검붉은 핏빛으로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3천 궁녀들 모두는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몸을 날렸고 이후 백마강의 물빛은 백제가 망하고 난 뒤에도 백제의 멸망을 아쉬워나 하는 듯 몇 해 동안이나 검붉은 핏물이 계속 흘렀다고 한다.
백마강을 향해 뛰어내리는 3천 궁녀의 모습은 마치 찬바람에 꽃이 지듯, 비에 맞아 꽃이 떨어지듯……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뛰어내리는 3천 궁녀의 모습은 서글픈 한 송이 꽃이었고, 또 그들은 나라의 멸망을 가슴으로 아파하며 죽어간 한 많은 한 떨기의 꽃이었다.
그래서 3천 궁녀가 원혼이 된 그 벼랑 끝 바위가 있는 곳을 사람들은 낙화암(落花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3천명이나 되는 꽃다운 궁녀들이 적의 손을 피해 죽어간 곳. 백제의 마지막 원혼이 잠든 곳.
낙화암, 낙화암, 그 원한의 낙화암! 그것은 백제의 최후를 장식한 비장한 한 폭의 화폭이었다!
백제의 꽃, 그 궁녀들이 몸을 날려 백제의 최후를 장식한 곳.
아! 낙화암이여! 3천 궁녀의 원혼이여! 백제의 서글픈 최후여!
이것이 660년 7월 18일이었으니 온조대왕이 세운 백제나라는 건국한 지 678년 만에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오늘도 푸르른 백마강의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고, 3천 궁녀들이 치마폭을 휘날리면서 백제멸망을 원통해 하며 몸을 날린 그곳에는 그날에 그들의 마음을 달래 듯 늘 푸른 소나무 한 그루와 함께 ‘낙화암’이란 현판이 걸린 정자만이 오늘도 말없이 흐르는 백마강 위에 서 있을 뿐……

<끝>

지금까지 한지윤의 '백마강에는 낙화암'을 애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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