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례에 흐르는 인간존중 정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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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례에 흐르는 인간존중 정신〈5〉
  • 조장연 <성균관·철학박사>
  • 승인 2021.07.1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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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시경(詩經)》 전체를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는 말로 요약했고, 특히 제일 처음에 나오는 〈관저(關鴡)〉에 대해 “즐거워도 넘치지 않는다(樂而不淫)”고 평가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자기 조절을 이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행위에 중용의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의 연장선에서 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 가례의 보급과 국가 의례
‘가례(家禮)’는 관혼상제의 사례(四禮)를 중심으로 한 유교 의례로, 전통사회에서 가정의 행위규범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주자가 지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말은 본래 《주례(周禮)》의 〈가종인(家宗人)〉 조목에 보이는데, 조빙(朝聘)이나 회맹(會盟)과 같은 집단 사이의 행위규범이나, 조회(朝會)나 군례(軍禮)와 같은 집단의 공식적인 행위규범, 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나 향사례(鄕射禮)와 같은 민간집단의 행위규범에 비해, 한 가족이나 그 구성원의 행위규범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행위규범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가례’가 들어온 것은 고려말 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사대부들로부터이다. 특히 유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왕조는,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생활 속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불교적인 생활습속을 유교적인 습속으로 바꾸기 위해 유학의 예제(禮制)를 보급하는 데에 큰 힘을 기울였다. 사대부 계층에 대한 ‘가례’의 실천은 법률적인 제재력을 갖고 강력하게 실천됐으며, 일반 민중의 일상생활 양식을 지도하기 위한 중요한 지침으로 인식됐다.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성리학적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면서 이를 현실 생활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가례’를 비롯한 유학의 예론(禮論)을 이론적으로 탐구하게 돼, 예학(禮學)을 연구하는 학자가 많이 나오게 됐고, 예론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게 됐다. 

‘가례’의 구체적인 내용은 유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대부 계층의 행위규범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가례의 내용이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 삶의 중요한 통과의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행위규범을 담고 있다. 

그런데, 주자학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조선사회는 가례에 대한 엄격한 시행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고려시대의 유풍이 점차 유교적 의례로 대치되는 특징을 지녔다. 예컨대, 민며느리제와 데릴사위제 등 기존의 풍습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혼례의 절차중 하나인 친영례(親迎禮)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친히 맞이하는 것이다. 고려시대까지는 결혼이란 ‘장가가는 것’을 뜻했으며, 즉 처가에 들어가 살다가 애기 낳고 나서 분가해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주자가례》에서 의미하는 친영례는 결혼식만 처가에서 올리고 결혼식을 올린 후 바로 시댁으로 와서 결혼생활은 시댁에서 하는 것을 뜻했다. 이는 《주자가례》 이전의 우리의 전통적인 결혼방식과 다르므로, 상당기간 안착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율곡선생의 경우에도, 아버지가 친영례를 하지 않고 강릉 처가로 장가를 들어 거기에서 낳아 5~6세 때까지 외가에서 살았고, 그 이후 본가인 파주로 올라왔다. 율곡선생 역시 황해도 해주로 장가가서 해주 쪽에서 살았다는 점으로 볼 때, 율곡선생이 주자학을 강조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결혼 습속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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