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례에 흐르는 인간존중 정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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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례에 흐르는 인간존중 정신〈6〉
  • 조장연 <성균관·철학박사>
  • 승인 2021.07.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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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17~18세기 이후 국가적인 강조에 의해 주자가례의 친영례가 강조됐고, 그러므로 적어도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만 국한해서 본다면 《주자가례》가 우리 삶 속에 온전히 정착한 것은 300년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의 정립과 그 시행은 하은주 삼대의 정치가 그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모했듯이, 시의성(時宜性)을 중요한 조건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는 이념적 지향 못지않게 현실적 실천의 측면을 염두에 둬야만 하는 것이다.

예가 사회적 규범인 이상 고정적인 것일 수 없고, 공간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기에 공자는 “은나라는 하례(夏禮)에 말미암았으니 손익한 바를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은례(殷禮)에 말미암았으니 손익한 바를 알 수 있으며, 혹 주나라를 계승한다면 비록 백대(百代)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論語》 〈爲政〉)라고 해 하(夏), 은(殷)의 예의 손익(損益)을 말했다.

주대(周代)의 예는 종교적 성격이 많이 감소되고 정치적 윤리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주왕실의 통치수단적인 의미가 반영됐음을 뜻한다. 한편으로 공자의 시대는 ‘무도(無道)의 사회’로 표현할 만큼 각국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전념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공자는 도덕적 인간성 회복에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해, 위인(爲仁)의 방법으로서 사사로운 자기를 극복해 예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했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인(仁)이라고 한다면 예는 그것의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여기서 예는 비로소 철학적인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극기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論語》 〈顔淵〉)라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사물(四勿)로서 언행시청(言行視聽) 등 모든 행동을 예에 의거해 제약하라는 것이며, 결국 복례(復禮)의 의도는 본래적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예는 본래 종교적 의례 형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러한 경외지심은 종법적(宗法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법제(法制), 사회적 전례(典禮), 윤리적 예의(禮義)로 확장돼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중추적인 형식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에서 ‘가례’는 고려말부터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실천됐지만,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주자학의 유입과 맥을 같이하며, 조선왕조에 들어와 본격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관혼상제를 중심으로 해 일상생활과 주요한 통과의례를 모두 유교적, 특히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하도록 하는 것이 ‘가례’의 주목적이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전통적 가정의례와 맞지 않는 점도 있었는데, 조선 후기 사회에 와서는 《주자가례》가 정착됐다. 율곡은 《격몽요결》에서 특히 제사와 장례는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르라고 했지만, 《주자가례》 자체가 세목에 있어서는 불충분한 점이 많이 있고, 또 예는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 중기 이후 《주자가례》에 대한 수정과 보충이 다양하게 이뤄졌다. 

관혼상제의 가례는 절차와 과정을 문제 삼는 것으로 비쳐지지만, 예를 통한 유교이념의 구현이라는 공통된 목적의식은 꾸준한 변화와 경장 속에서도 일관되게 견지됐다. 주자가 〈가례서(家禮序)〉에서 ‘근명분숭애경(謹名分崇愛敬)’이라 했듯이, 그 근본적인 목적은 그 절차를 통해 명분을 높이고, 그들의 삶이 인간다운 삶이라는 자존의식을 갖게 하는 동시에 가족 상호간의 애정과 공경을 돈독히 하는 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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