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익 소리판 ‘사람이 사람을 만나’ 공연 “열기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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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소리판 ‘사람이 사람을 만나’ 공연 “열기 뜨겁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2.10.1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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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 출신〉 소리꾼 장사익
장사익 소리판 ‘사랑이 사람을 만나’ 공연 포스터.

지난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 ‘고향 주민들 관람하며 응원’ 
장사익 소리꾼 ‘고향 광천과 토굴새우젓축제 알리며 사랑 표현’
서울 이어 인천(11. 26.), 전주(12. 4.), 대전(12. 23.), 대구(12. 31.) 공연

 

홍성 광천 출신의 소리꾼 장사익(73)이 코로나19 이후 첫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가장 한국적인 서정을 노래하는 소리꾼으로 평가받고 있는 장사익의 공연 제목은 ‘장사익소리판-사람이 사람을 만나’이다.

지난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진행된 ‘장사익 소리판’ 공연에는 고향인 광천에서 50여 명이 참석해 응원한 가운데 성황을 이뤘다. 이날 공연에는 광천읍주민자치회(회장 장순화) 임원들과 광천중학교총동문회(회장 편기범) 임원진과 회원 등 50여 명이 참석해 관람하며 응원했으며, 새하얀 한복 차림의 소리꾼 장사익은 이번 공연을 통해 고향에서 참석한 관람객에게 감사를 표하며, 광천과 광천토굴새우젓축제를 알리는 등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전했다.

‘장사익 소리판’은 장사익이 1994년 시작해 2년 주기로 개최해온 단독 공연이다. 당초 2020년 공연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취소됐고, 2018년 이후 4년 만에 열리는 공연이다. 

홍성군 광천 출신의 장사익은 1994년 45세의 나이에 ‘장사익 소리판-하늘 가는 길’로 데뷔했다. 2018년 발표한 ‘자화상’까지 총 9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날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11월 26일 오후 6시 인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12월 4일 오후 6시 전주 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 12월 23일 오후 7시 30분 대전 예술의전당 아트홀, 12월 31일 오후6시 영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에서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다. 

소리꾼 장사익은 1994년 데뷔 이후 가요, 국악, 재즈를 넘나들며 구성지고 비장하면서도 폭발적인 창법으로 마니아층을 만들어 왔다. 특히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시에 곡을 붙여 단순히 듣고 즐기는 노래에서 인생의 의미를 돌아보는 묵직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시를 노래한 신곡 4곡을 선보이며 시가 있고 노래가 흐르는 아름다운 공연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공연 제목인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마종기 시인의 ‘우화와 강’의 한 구절인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에서 인용했으며, 서정춘 시인의 ‘11월처럼’, 허형만 시인의 ‘구두’, 한상호 시인의 ‘뒷짐’이라는 시에 가락을 붙여 노래했다. ‘찔레꽃’을 비롯한 대표곡도 함께 불렀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자신은 물론 관객들에게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알아보는 시간이 되고 있다는 평이다.

한편 소리꾼 장사익은 지난 3월 16~21일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에서 개인전 ‘장사익의 눈’을 열었다. 지난 몇 년간 스마트폰으로 집 주변의 풍경과 사물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포착해서 촬영한 60여 점의 사진을 선보였다. 지난 2019년 ‘낙락장서(落樂張書)-붓으로 노래한 장사익의 낙서’라는 제목으로 첫 서예전을 연 데 이은 두 번째 전시였다고 전한다.

본 기자가 서울에서는 몇 차례 인터뷰 시간을 가졌으나 공연 일정 등으로 이번에는 대면 인터뷰가 어려워 지난 2006년 고향으로 귀향, 고향의 신문기자로 가진 첫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 “신나게 원 없이 소리칠란다”
공연 앞둔 ‘국민 소리꾼’ 장사익. 우리시대 최고의 가객(歌客), 광천 삼봉이 고향인 이 시대의 진정한 소리꾼, 음악은 어디에도 얽매지 않고 자유스러워야 한다고 수줍은 듯 단호히 말하는 사람, 시를 수백 번이고 읊조려 시(詩)로 만들고야 만다는 사람, 마흔다섯 나이에 평생 해보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 성공한 사람, 노래는 팔자고 운명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소리꾼 장사익. 그의 이름은 이렇게 다가왔다.

북악과 인왕을 바라보며 고단했고 못마땅했던 지난 세월을 필름으로 되돌리듯 희끗한 촌사람, 쉰여덟 해, 그의 생애에는 우리네 고된 삶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구슬프게 울리던 ‘찔레꽃’이 어느새 장중하고 무겁게 내리치는 듯 더불어 사는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안고 짊어진 짐의 무게를 풀어주는 장사익의 노래는 ‘사람이 그리워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고 있다.

마흔다섯 나이에 느지막이 시작됐지만 그의 변신은 결코 늦깍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풍김이 있다. 수더분한 충청도 사투리에 변함없는 겸손이 더욱 정겨운 사람이다. 현실에 집착하는 끈을 놓으니 꿈이 잡히더라는 장사익의 말은 척박한 현실에서 꿈을 이룬 그의 삶이며 신명이다.
이제 데뷔한 지 12년, 50년은 돼 보인다. 한번 마음먹고 3년만 죽도록 해보자. 장사익은 1993년부터 김덕수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웅변을 했다고 한다. 워낙 음치여서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된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올라가 마음껏 목청을 높였다. 그때 ‘소리’가 터졌다고 한다. 

오서산의 기를 받아서 일까. 그의 내공이 터진 것은 1993년의 일이다.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공주농악 태평소로 장원을 차지하면서 드디어 ‘등극’을 한 것이다. 같은 해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는 ‘결성농요’로 ‘대통령상’을 탔다. 그에게 1993년은 국악연주자로서의 자리를 확인해 주었고, ‘시’에 눈을 뜨게 해준 의미 있는 해로 기억된다. 

1994년에는 자신을 확인하는 계기를 갖는다. 또다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금산농악 태평소로 장원을 차지하면서 ‘장사익’을 재확인한다. 결국 태평소가 장사익의 노래 길을 열어 준 셈이 됐다. 그해 11월에는 서울 신촌에서 ‘소리꾼’으로서 첫 공연을 갖게 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열정적인 흥얼거림의 미학은 계속되고 있다.

1994년 장사익 소리판 ‘하늘가는 길’로 ‘가수’라는 걸 데뷔했다. 기침(1998), 허허바다(2000), 꿈꾸는 세상(2003) 등의 음반을 냈고, 1996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장사익 소리판 하늘가는 길’ 공연 이후 60여 차례의 공연을 국내외에서 진행했다. 

1995년 ‘뜬쇠사물놀이’로 KBS국악대상, 1996년 ‘뿌리패사물놀이’로 연거푸 KBS국악대상을 수상했다. ‘빼고 또 채운다’는 장사익의 철학처럼 오는 12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정기공연 ‘사람이 그리워서’를 선보인다. ‘10년이 하루’ 이후 2년 만의 외출에서 돌아와 온몸으로 부르는 그의 ‘사람이 그리워서’ 찾는 목청을 만나봐야겠다. 올 한해 ‘민초’들의 위안이 될 것임에. (문의는 02-396-0514)

장사익과 국악은 ‘인연’이 깊다고 한다. 장사익은 1949년 홍성군 광천읍 광천리 삼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미 그에겐 농악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광천 장날 장터에서 울려 퍼지던 흥거움의 가락소리는 성장 과정에서도 그에게 큰 영향이 됐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소문난 장구잽이였다고 한다. 부친의 가락을 듣고 자라던 장사익에게 우리가 ‘쇄납’이라고 부르는 ‘태평소’의 소리는 그의 귀를 뻥 뚫리게 하고도 남았다. 그래서 시작된 ‘태평소’와의 인연이 오늘의 장사익을 있게 한 원인이다. 

그는 별의별 일을 다 해보았다고 한다. 광천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한 장사익은 선린상고 졸업 후 열대여섯 가지의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면서도 ‘노래에 대한 꿈’의 끈을 놓지 않은 것도 장사익의 ‘집념’이고 ‘의지’였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피리도 불고, 태평소도 잊지 않았다.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라이브공연에서 태평소 연주를 맡은 것도 장사익이었다.

국악을 바탕으로 무르익은 그의 노래는 독특한 창법을 이루면서 소리꾼 ‘장사익 창법’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은 장사익의 지독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래서 그가 판을 벌이면 언제나 관객은 자리를 꽉 메운다. 가축 장사를 하던 평범한 농부의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의 모습도 전형적인 농부다. 농부는 일등을 하려고 아득바득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흙의 진리를 아는 질그릇 같은 맛을 지닌 가수가 바로 장사익이다. 

그는 마흔이 넘어 내린 자신의 결단에 대해, 아무것도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는 독학으로 1년 동안 단소를 배우고, 5년 동안 피리를 익혔으며 1986년부터 태평소를 불었다. 그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장사익의 내공이었음에랴.

북한산 자락의 한 마리 새,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든 3년만 해봐라. 인생이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국민 소리꾼’ 장사익은 1965년부터 서울생활을 했다지만 아직도 서울말보다는 충청도 사투리가 더 익숙하게 어울리는 ‘홍성사람’이었다. 

<2006. 11. 2. 한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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