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새로움을 향해 끝없는 도전을 한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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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새로움을 향해 끝없는 도전을 한 예술가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2.1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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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을 대표하는 훌륭한 역사 인물 중 문화예술인으로서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이 있다. 화백은 한국과 유럽에서 활동했던 당시에도 한국 미술사와 더불어 유럽 미술사에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예술가로 예우를 받았고, 사후인 현재에도 한국근현대화단을 대표하는 훌륭한 예술가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에서, 여항문인 집안의 부친 이근상과 모친 김해 김씨의 슬하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고, 애국지사 이근주 선생(1860~1910)의 조카가 된다.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오롯한 정신은 가풍(家風)이자 홍주(洪州)의 강한 기질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홍천마을은 용봉산과 월산이 품고 있는 너른 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화백이 나고 자란 곳이자 머나먼 타국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했던 영원한 고향, 영혼의 안식처이다. 

지난 2011년 홍성군이 이곳에 생가터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한 뜻도 화백의 영혼이 머물러 쉬길 바라는 소망과 선생의 예술작품에 담긴 인류애와 정신을 고국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함이다. 

이응노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는 늘 새로움을 향한 도전이었다. 17세가 되던 해인 1922년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문인화법과 서예를 두루 익혔고, 1935년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며 서양 화풍에 동양화의 필묵 맛이 결합한 “신남화” 양식을 창작했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민족주의 예술정신을 강조하며 한국미술 정통성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960년 프랑스에 정착한 후 <오브제 꼴라주>, <문자추상> 등 작품으로 유럽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고, 1977년에는 납치미수사건 의혹을 받으며 한국 활동 금지를 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응노는 늘 새로운 실험정신을 발휘하며 유럽 미술계에서 동서미술융합을 뛰어넘어 시대를 앞서는 예술형식을 발표하며 국제예술양식에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아울러 한국의 정세에도 늘 관심을 뒀고, 조국의 동포들을 염려하며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향 홍성을 그리워 한 채 1989년 1월 프랑스 파리 세르누쉬 고암서방에서 삶의 여정을 멈췄다. 

이번 고암 이응노 화백의 삶과 예술여정을 소개하는 칼럼에서는 한국근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냈던 이 화백의 삶의 이야기와 동양과 서양미술의 내용과 형식을 융합해 늘 새롭고 혁신적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던 예술세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어린 이응노의 이야기, 1920년대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성장한 후 독창적 묵죽화 탄생 과정, 1935년 이후 일본 유학시기 서양 화풍에 동양화의 필묵 맛이 결합한 “신남화” 양식 작품, 1945년 해방 이후 민족주의 예술정신과 한국미술 정통성 회복 운동, 1960년대 프랑스 이주 후 재료와 형식이 자유자재한 <문자추상> 작품시리즈, 1967년 “동백림” 사건과 옥중獄中 창작 작품, 인류애와 평화를 담은 <군상> 작품 제작 이야기 등 늘 새로움을 향한 도전과 창작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고암 이응노 화백의 예술노정을 그려보고자 한다.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 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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