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78돌 특별기획④-김좌진의 딸 산조, 2003년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세상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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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78돌 특별기획④-김좌진의 딸 산조, 2003년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세상 떠나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9.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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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성 목단강 전경.
흑룡강성 목단강 전경.

김기철 노인은 백야 김좌진 장군의 딸 산조를 데려오기 위해 3년 전에 키우라고 주고 온 칠가툰의 중국인 이 씨를 찾아갔다. 그냥 빈손으로 간다는 게 인사가 아니어서 어렵게 구한 싸라기 두 가마를 가지고 찾아가서는 통사정을 했다. 

“그동안 아이를 길러주신 은혜를 어찌 말로 다 갚을 수가 있겠소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하니 산조를 저에게 돌려주시기 바라오.” 

그러나 중국인 이 씨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까지 저희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 애지중지 키운 아이를 어떻게 다시 돌려달라고 하십니까? 안됩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딱한 사정을 아뢰고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까? 이 아이만은 우리 독립군들이 데려다 길러야 할 사연이 있단 말입니다. 원수의 흉탄에 쓰러진 백야 김좌진 장군의 단 하나밖에 없는 혈족이란 말이오.” 

김기철 노인은 가지고 간 싸라기 두 가마를 그동안 산조를 키워준 고마움의 뜻으로 건넸지만 젊은 중국인 부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기철은 계속 젊은 중국인 부부에게 간절히 사정을 했다. 

“저희들이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좋은 쌀 두 가마를 더 구해다 드리겠소. 그 아이를 저에게 돌려주시오.” 

그러자 중국인 부부는 마지못해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정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서 좋은 쌀 두 가마를 더 구해 오시오. 그러면 아이를 돌려 드리겠소.” 

하는 수 없이 김기철 노인과 독립군들은 본부로 돌아와 어렵게 구한 쌀 두 가마를 더 갖다 주고 산조를 데려올 수 있었다. 

김좌진은 만주에서 1927년 고향인 홍성 출신의 김영숙과 재혼을 한다. 이듬해 6월 만삭의 몸으로 해림에서 동산시로 가던 김좌진의 부인 김영숙은 산길에서 딸 강석을 낳자마자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다. 딸은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살아있는 채로 발견됐다. 훗날 이 딸을 ‘산조(山鳥)’라고 부른 까닭은 산에서 낳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이때 태어난 딸은 동냥젖으로 두서너 달 잘 자라고 있었는데, 김좌진의 뜻에 따라 어떤 한족에게 맡겨졌다. 

이후 김좌진 장군이 사망하자 장군 생전에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기철 노인이 쌀 두 가마니를 주고서 강석을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김기철 노인은 강석을 친딸처럼 잘 길렀다. 

충남 홍성이 고향인 김기철 노인은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뒤 독립운동에 뛰어든 지식인이었다. 김 노인은 강석을 “조(鳥)야, 조야…”라고 부르면서도 김좌진 장군의 딸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혹여 장군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피해를 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김기철 노인은 강석을 데리고 해남촌의 깊은 산골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해방 이후에는 연수현으로 다시 옮겼다. 강석은 이 무렵 ‘산조(山鳥)’라는 이름에서 ‘순옥(順玉)’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강석이 아홉 살 되던 해 소아마비의 일종인 병에 걸리자 김기철 노인은 사방에 수소문해 일본에 건너가 치료를 받게 했다. ‘김좌진 장군의 딸을 살리자’고 밝히자 조선과 동북 연해주, 일본에 있는 사람들까지 암암리에 돈을 모아 치료비를 대기도 했다. 양부인 김기철 노인은 세상을 떠나기 전 김강석을 불러놓고 ‘독립군 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의 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려준다. 강석이 열네 살 되던 해였다. 

김기철 노인은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김좌진 장군의 유품과 관련 서류 등을 모두 강석에게 전해 줬다. 양부인 김기철 노인이 세상을 떠난 뒤 강석은 마적의 후예라는 오해를 받고 감옥살이를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이때 조선족 청년 위정규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듬해 딸(홍련)을 낳았으나, 1951년 6·25 한국전쟁에 끌려간 남편마저 전사하고 만다. 1952년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흑룡강성 목단강시로 이주했다. 강석은 숱한 세월을 가난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아왔다.  

1930년 1월 29일 음력 설을 앞두고 김좌진 장군이 피살된 후 처음으로 조선인들은 만주 땅에 남아 있는 장군의 딸 강석을 찾게 된다. 당시 김순옥은 김좌진 장군이 정식으로 결혼해서 낳은 유일한 피붙이였다. 이후 1995년 강석은 광복 50주년 기념행사 때 해외독립 유공자로 초청받아 우리나라에 왔지만, 막상 정부는 아버지 묘소에 성묘조차 하지 못하게 출국을 시켰다.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이라고 초청은 했으나, 김좌진 장군의 친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여론이 그 이유였다. 

아버지 묘소에 엎드려 평생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이 울어보고 싶었던 강석은 슬픔과 눈물 속에 절망하고 만다. 산속에서 태어나면서는 ‘산조(山鳥)’라는 이름으로, 또 ‘김순옥(金順玉)’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김좌진의 딸, 김강석’의 삶은 어쩌면 한 많은 여인네의 삶과도 같은 한이 서린 아리랑 가락은 백야 김좌진의 딸 김강석의 삶을 노래한 것은 아닐까. 

‘백야 김좌진 장군의 딸, 김강석’은 오랜 지병인 관절염과 유방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결국 지난 2003년 9월 14일 75세의 나이로 아버지 백야 김좌진 장군이 순국한 흑룡강성 해림시에서 30여 분 거리에 있는 목단강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난 1995년, 해방 50주년 기념행사에 정부로부터 해외독립유공자로 초청받아 대한민국 서울 땅을 밟았고, 그렇게 그리던 ‘백야 김좌진 장군의 묘소’와 갈산의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를 밟아보지 못한 채 오직 사진으로 남은 모습을 가슴에 품고서 그렇게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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