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석면질환 판정에 가슴은 ‘철렁’ 눈물은 ‘뚝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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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석면질환 판정에 가슴은 ‘철렁’ 눈물은 ‘뚝뚝’
  • 취재·사진=한기원·김경미 기자, 자문=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 신은미
  • 승인 2023.10.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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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석면피해지역 충남, ‘석면피해기록관’을 세우자〈8〉
전태곤 씨는 광산 석면광산에서 200~300명의 인부들을 관리하는 일을 3년 동안 했다. 전 씨는 지난 2021년 석면폐증 2급을 판정받았다.
광천 석면광산에서 200~300명의 인부들을 관리하는 일을 3년 동안 했전 전태곤 씨는 지난 2021년 석면폐증 2급을 판정받았다.

예산지역 석면피해자 전태곤 씨

■남편, 광천 노천광산서 관리 업무… 아내, 남편따라 광산 인근에 거주
예산 덕산면 읍내리 전태곤(78) 씨는 장항이 고향이다. 8살에 아버지를 따라 누나, 형,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이곳 덕산으로 이사왔다.

전 씨는 31살이 되던 해 늦깎이 장가를 갔고, 대천이 고향인 아내 윤정희 씨와 홍성에서 2년가량 살았다. 그러다가 광천읍 상정리 소재 노천광산(露天鑛山)인 ‘대원산업’에서 광산 허가부터 개발, 인력 등 노무관리 등의 일을 하게 됐다. 결국 부부는 광천읍 신진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3년간 거주했다.

“당시 대원산업은 하루에 200~300명 정도의 인부를 쓰는 꽤 큰 석면광산이었어요. 특히 전라도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남대 광산과 출신들 말이죠. 나머지는 광천이나 결성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천광산이라 굴은 없었지만, 여러 가지 관리를 하기 위해 매일같이 현장을 누볐죠.”

전 씨는 지난 2021년 석면폐증 2급 판정을 받았다.

“홍성의료원에 매주 월·수·금요일마다 투석을 받으러 가는데, 어느 날 광천의 한 후배가 ‘예전에 광산에서 일하지 않았느냐’며 석면질환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유를 하더군요. 그 말에 순천향대학병원에 문의 후 검사를 받았어요. 두 달 후 석면폐증 2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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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덕산읍 읍내리마을 전태곤·윤정희 씨 부부
정부가 기간을 정해 지원하는 것 이해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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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씨는 석면질환자에게 매달 지급되는 요양생활수당을 2년 간 지급받았다. 그리고 이번달에 지원은 끝이 났다.

“석면피해구제제도가 대체 뭡니까? 구제를 해줘야 하는데 기간을 정해서 지원을 해준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과연 어디까지 얼마만큼 구제를 해줘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해 보여요.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도 전화를 걸어 항의성 문의를 하기도 했어요.”

전 씨는 정기적으로 찾아야 하는 석면환경보건센터가 먼 곳에 있는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건강관리를 위해선 순천향대학병원 석면환경보건센터를 수시로 방문해야 하는데 최근엔 건강이 좋지 않아 혼자서 다닐 수가 없어요. 누군가 도움을 줄 사람을 대동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가 않죠. 그래서 자주 검사받기가 힘들어요. 그리고 피해자들끼리 모여서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으면 좋겠어요. 정책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선 우리가 한마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스물여덟에 전 씨에게 시집온 윤정희 씨(76)는 줄곧 주부생활을 했다. 광산일을 하진 않았지만 남편의 일터였던 터라 수시로 광산을 들락날락했다.

남편 전 씨가 3년간의 광산일을 그만두면서 부부는 다시 홍성으로 이사와 3년간 지냈고, 이후 1983년 예산 덕산으로 다시 이사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윤 씨는 지난 2022년 석면폐증 3급을 판정받았다.

“지난해 7월 순천향대학병원에서 가슴 종양 검사를 하던 중에 석면 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어요. 보호자도 없이 병원을 갔던 터라 갑작스러운 의사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져서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한참을 울었어요.”

취재를 위해 찾아온 기자를 향해 고성을 지르며 문전박대했던 윤 씨는 기자가 건넨 홍주신문에 보도된 충남도 내 지역별 석면피해자 인터뷰 기획기사를 보곤 마음이 누그러지며 집안으로 안내했다. 윤 씨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약자 편에 서서 우리네 마음에 와닿게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다니 정말 놀랍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매달 요양생활수당을 받고는 있지만 생활을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에요. 그리고 곧 수당 지급이 끊기면 앞으로의 삶이 막막해요. 죽어서 돈 주면 뭐해요, 살아있을 때 도와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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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지역 석면피해자 신동실 씨

신동실 씨는 20대 초반 목수였던 사촌형을 따라 2년간 슬레이트 지붕 공사를 따라다녔다. 신 씨는 석면폐증 3급에 이어 2급 판정을 받았다.
20대 초반 목수였던 사촌형을 따라 2년간 슬레이트 지붕 공사를 따라다녔던 신동실 씨는 석면폐증 3급에 이어 2급 판정을 받았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상징… ‘석면 슬레이트’ 지붕 설치 작업
예산 예산읍 신례원2리마을 신동실(75) 씨는 이 마을 터줏대감이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7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평생을 지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사회 발전을 이뤘지만, 농촌은 도시에 비해 발전 속도가 느려 여러 가지 면에서 뒤떨어진 상태였다. 도시와 농촌의 수준 차이가 점차 벌어지자, 박정희 정부는 그 대책의 하나로 ‘새마을 운동’을 추진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 장관 회의에서 제안하면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을 3대 정신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에 생활 태도와 환경 개선, 소득 증대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후 전국 곳곳에서 도로 확장과 하천 정비, 농촌 주택 개량, 전기와 전화 시설 확충, 농경지 확장 등 농촌의 생활 기반을 개선하는 활동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주로 농촌 지역에서 시행되었으나 차츰 도시로 확대돼 전국적인 운동이 됐다.

새마을 운동은 풀뿌리 운동이 아니라 정부 주도의 운동이었지만, 도로를 닦거나 지붕을 바꾸는 일 등은 마을주민들의 손으로 이뤄졌다. 이런 가운데 당시 스무 살이 갓 넘은 신동실 씨는 목수였던 사촌형을 따라 마을 집집마다 슬레이트 지붕을 설치하는 일을 2년가량 도왔다.

“저보다 열살은 더 먹은 사촌형이 목수였어요.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사촌형은 슬레이트 지붕을 설치하는 일을 많이 했죠. 보통 몇 명이 조를 이뤄 작업을 하곤 했는데, 그곳에 막내로 2년 정도 쫓아다니며 심부름을 했었어요. 슬레이트 지붕을 옮기고, 크기에 맞게 톱으로 자르거나, 못으로 박는 일을 주로 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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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예산읍 신례원2리마을 터줏대감 신동실 씨
목수였던 사촌형 따라 2년간 슬레이트 지붕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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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씨는 그 이후로는 석면과 관련된 일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30년 전쯤 신 씨의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고 점점 심해져서 병원을 갔었어요. 폐 상태가 좀 안 좋다는 얘기만 들었고, 약을 먹었더니 좀 나아지는 듯했어요. 근데 세월이 흐를수록 일을 조금만 하면 숨이 가쁘고, 가래가 계속 생기기도 하고,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기도 했어요. 그래도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살았죠.”

신 씨는 결국 지난 2019년 석면폐증 3급 판정을 받았고, 이듬해인 2020년 석면폐증 2급 판정을 받았다. 이후 집에서 약 30km 거리에 있는 순천향대학병원에서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내가 석면피해자라는 사실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매우 불쾌하고 지난날이 후회됩니다. 진작에 석면에 대한 위험성을 알았더라면 다른 일을 했을텐데 말이죠. 요즘은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농촌마을에 슬레이트 지붕이 꽤나 있어요. 예산 신례원역 앞에 옛 충남방적도 아직 슬레이트 지붕인데, 점점 낡을수록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석면가루가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우리 폐에 박히게 될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신은미 활동가와 신동실 씨 자택에서 석면피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신은미 활동가와 신동실 씨 자택에서 석면피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이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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