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기억, 그리고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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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 그리고 재현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12.14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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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기억’은 예술, 그중에서도 문학의 주요 소재 가운데 하나다. ‘모더니즘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27)의 주제는 ‘시간과 기억’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집필에만 무려 14년이나 걸렸고, 쪽수로는 4215쪽, 권수로는 일곱 권,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총 12권에 이를 정도로 방대하다. 작가 프루스트의 자전적인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사회의 주류가 된 신흥 부르주아 계층과 점점 몰락해가는 귀족 계층 간의 사회적 갈등을 전경화한다.

동시에 사랑과 이별, 그로 인한 고뇌와 슬픔 등 삶의 덧없음을 예거한다. 읽는 게 녹록치 않지만 ‘의식의 흐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면, 이 작품에서 유년기의 추억, 가슴 시린 사랑, 전쟁, 시간이 앗아가는 젊음, 필생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 등 삶의 모든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의 전반적 철학을 갖고서 천재적인 수준으로 사람과 장소에 대한 묘사들을 흩뿌려놓았다”는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결코 췌언이 아니다.

주지하듯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형식과 내용에서 독특함과 난해함을 특장(特長)으로 삼는다. 독특한 문장 구조로 사랑, 죽음, 예술 등 진지하고, 추상적이고,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전통적인 소설은 발단에서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극적 구성’에 의해 뒷받침되고, 등장인물들은 거기에 종속된다. 하지만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필연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려는 것은 ‘극적 구성이 단단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이 그렇듯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것, 의식 속에 비쳐지는 모든 영상과 운동, 경험의 총체, 삶의 총결산 등이다.

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소설은 ‘벨 에포크’ 시대에 프랑스 신흥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나(마르셀)’가 많은 일을 겪고 중년이 된 시점에서 시작된다. 본성적으로 ‘나’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공상가적인 인물이다. 젊은 시절부터 사교계를 출입하며 여러 사람과 교유하지만 사회적인 명성, 여인에 대한 동경 등 사교계의 규범과 가치에 절망감과 회의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한입 베어 물면서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둘씩 떠올린다.

‘나’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 이야기 속에서 성장해 간다. 원래 작가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은 몇 년이 지나도록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서 괴로워했다. 마침내 제7부 최후에 이르러 ‘자신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가 드라마고 최고의 글 소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펜을 든다. 그는 시간의 위대함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의 예술적 자아를 발견한다. 그렇게 해서 쓴 작품이 독자가 그때까지 읽어왔던 주인공의 인생사, 즉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앞서 말했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시간’ 또는 ‘시간성’이다. 그런데 시간과 공간은 하나로 연결된다. 즉 이 작품은 시간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 이야기들이 모이는 곳은 ‘스완네 집’ 같은 하나의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이 몽환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보니 줄거리 자체가 모호하다. 이 작품에서 시간은 전지전능하다. ‘나’와 주변 모든 인간은 시간 앞에서는 그저 덧없이 흘러가는 존재일 뿐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동경했던 사람들이 늙고 초라해진 모습으로 게르망트가 파티에 참석한 모습을 길게 묘사한다. 소설에서 인생은 언제나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일 뿐이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독자들에게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생각들을 나열해가면서 자신의 생활사를 기술하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지는 않을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이 마치 하나의 대성당과 같이 탄탄하고 유기적인 구조를 지닌 건축물이기를 바랐다. 그는 독서와 습작을 통해 선배 작가들의 문장을 탐구했고 그들의 문법적 특이함과 독특한 개성을 추출해 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독서라는 수동적 행위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능동적인 ‘패스티시’를 거쳤기에 가능했다.

사전적으로 패스티시는 ‘다른 작가의 고유한 문체, 즉 스타일을 모방하는 행위’다. 패스티시의 목적은 단순히 원작자의 문체와 집필 방법을 모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작자가 쓴 문장들이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인상까지 모방하는 데 있다. 즉 패스티시는 어떤 작품의 문법적 특성을 포착해 이를 완전히 모방하는 것 못지않게 원작자의 인격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노력까지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때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혹은 이야기보다도 마치 현미경을 들이댄 듯 해부한 개인의 의식과 기억이라는 주제를 전달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체, 즉 고유한 스타일을 완성시키고자 프루스트가 행했던 노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뱅 쇼메의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2013)는 ‘기억에 대한 탐색’과 ‘치유’라는 점에 있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유비 관계에 있다. 주인공은 마들렌과 차를 매개로 촉발된 몸의 기억 덕분에 물질적 세계에서 감각적 환상의 세계로 유입시키면서 무의미한 일상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난다. 감각의 매개체인 ‘정원’과 ‘음악’은 문학 작품과 공통분모를 이룬다. 바로 그 점에서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본질에 다가간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엄마 아니타와 아기 폴이 장난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니타는 남편이자 폴의 아빠인 미셸을 부르는데, 미셸은 아무 이유 없이 폴에게 기괴한 비명을 지른다. 그때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한 남성이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깬다. 그는 서른세 살의 폴이다. 그는 이러한 악몽을 자주 꾸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렸을 때에 부모님을 여의고 이모들과 함께 산다. 그는 실어증으로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작은 칠판에 글을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폴은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우연히 들어간다.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들어가게 된 폴은 그녀가 집에 비밀정원을 가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그녀로부터 차와 마들렌을 대접받는다. 그녀는 폴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즉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치료하려 한다. 폴은 마담 프루스트 덕분에 자신의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는다.

사실 그의 기억 속에서 폭력적이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레슬링을 하는 것이었고 둘은 서로 매우 사랑했다. 마담 프루스트의 도움으로 폴은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나간다. 하지만 폴을 행적에 의문을 품던 그의 이모들이 결국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녀의 정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폴은 피아노를 매우 오랫동안 쳐왔고 콩쿠르에도 여러 번 참가했지만 입상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담 프루스트의 치료를 통해 기억을 찾게 된 폴은 기억 속에서 보았던 개구리 밴드와 함께 피아노를 쳐서 콩쿠르에서 상을 받는다. 그는 마담 프루스트가 준 차를 마시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는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뒤 이모들이 자신을 돌봐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즐겁게 춤을 추던 부모님이 천장이 내려앉아 피아노에 깔려 죽었고 바로 위층에 있던 이모들은 이를 방치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폴은 이모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기 위해 손을 자해한다.

시 당국이 자신의 정원의 병든 나무를 베기로 결정하자 마담 프루스트는 이를 막으려 애쓴다. 하지만 결국 나무는 베어지고 그녀 또한 암으로 죽고 만다. 이 사실을 모르는 폴은 마담 프루스트를 찾아간다. 그는 그녀는 이미 죽었고 그녀의 비밀정원 또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한다. 하지만 그는 두 동강 난 채 정원에 버려진 그녀의 우쿨렐레를 발견하고 우쿨렐레 교습소를 운영한다. 그녀 덕분에 기억을 되찾은 폴은 이제 홀가분하다. 그는 예전에 마담 프루스트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린다. “나쁜 기억은 행복의 홍수 밑으로 보내 버려. 수도꼭지를 트는 일은 네 몫이란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정원’이 프루스트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표현의 본질을 일깨우는 시적 공간이었듯이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 ‘정원’은 폴의 기억이 식물의 생리 작용처럼 신체적 감각을 촉진하는 지각의 공간이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음악이 시간적 층위를 끊임없이 재생하는 역할을 하듯이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서도 음악은 반복과 생성의 서사적 모티브로 활용된다. 음악은 서사의 변주와 변곡을 촉진하는 동시에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치유 과정에 개입하는 정원이나 음악은 몸이 체험한 시공간적 기억이다. 즉 정원이라는 공간적 체험과 음악이라는 시간적 체험이 서로 얽혀 신체적 통일성을 구현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는 메를로 퐁티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몸이 체험한 시각적 경험과 청각적 경험이 함축되어 지각 세계의 통일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의 단절로부터 애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시각적 환상’이 필요하다.

이 시각적 환상의 예는 영화에서는 폴이 개구리 악단과 협연하는 순간이고 소설에서는 마르셀이 환등기에 비친 이미지를 지각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몸이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근거가 되려면 언어적 측면이 중요하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정원이나 음악의 감각적 체험이 이룬 것은 환상이나 기억뿐만 아니라 언어를 되찾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프루스트는 현실과 환상이 깊게 교감하는 영화를 나열되고 속이는 이미지라고 부정적으로 간주했다.

많은 철학자들이 ‘모더니즘 예술의 최고봉’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 다양하게 논평했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1964)에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본질은 기억과 시간이 아니라 기호와 진실이며, 시간이 중요한 것 또한 모든 진실은 시간의 진실 때문이라고 말했다.

폴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 2》(1984)에서 들뢰즈의 주장을 일정 부분 받아들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프루스트의 소설이 ‘시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자신의 독서 가설이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제출했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작품을 유기적 총체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하는 개념으로 ‘파편성’과 ‘횡단성’ 개념을 제시하며, 거미와 거미줄의 비유로 화자-작품을 설명했다.

반면 리쾨르는 시간과 이야기의 관계라는 자신의 큰 틀 안에서, 프루스트의 소설의 형식적 특성을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이라는 ‘두 개의 초점을 갖는 타원’으로 설정하고, 이 두 초점 사이를 가로질러 되찾은 시간이 갖는 의미작용을 다양한 차원에서 탐색했다.

흔히 우리는 기억의 근거로 고정된 내용의 경험이 존재하고 기억은 그런 경험을 수동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의 주체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기보다 자신의 이해관계, 선호하는 것, 감정적 요소, 욕망 등에 따라 특정 요소들을 선택하거나 배제하며, 어떤 것은 부각하고 어떤 것은 감추거나 침묵시킨다. 이렇듯 재현에서는 편집과 왜곡이 불가피하며, 재현은 늘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든 재현은 다 주관적 편집에 지나지 않으며, 신뢰하기 힘들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경계해야 할 것은 재현의 불완전성 그 자체보다 총체적 진실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대안적 재현을 배제하는 억압적 권력의 위험성과 횡포다. 물론 재현 철학에는 여전히 이론적으로나 실천적 차원에서 불분명한 부분이 존재한다. 원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재현의 유물론적 근거나 다양한 재현들의 상호 교차와 작용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해답을 찾는 과정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또 어렵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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