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
상태바
오페라 이야기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3.02.21 13:32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페라의 역사에서 빛나는 두 거장 주세페 베르디(1813-1901)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가 1813년에 태어났으니 올해가 그들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 유명 오페라극장들이 그들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분주하다. 국내에서 잘 공연되지 않았던 바그너 작품들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하니 오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호사를 누릴 듯싶다. 그러나 오페라를 이해하기에 쉽지 않을뿐더러 입장료도 만만치 않아 오페라 극장으로 향하는 발길은 가볍지 않다.

오페라가 1600년경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때 음악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연극을 위한 실험예술이었다. 중세 천년의 예술 암흑기를 지나오면서 피렌체 르네상스인들은 고대 그리스 연극을 되살리려 했고 몇몇 귀족과 문인, 예술가들이 요즘의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고대 그리스 비극을 작은 방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임을 <카메라타 Camera>(작은방)라 불렀다. 이들은 신을 찬양하는 성극(聖劇), 수난극(受難劇) 같은 종교극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을 다루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부활시켜 종합예술로 재탄생 시키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카메라타에서 습작들을 하나, 둘 만들어 작품이라는 뜻의 OPUS에 1, 2, 3으로 번호를 붙여 나갔는데 이것이 '오페라'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

최초의 오페라는 <다프네>이지만 악보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에우리디체>다. 미와 덕성의 상징인 에우리디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의 아내다. 오르페우스는 열정적인 남편이자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지옥에서라도 구출하려는 인물이니 그 당시 대중들에게 상당히 감동을 줄 수 있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이 당시의 오페라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스 신화 속의 주인공, 전설 속의 영웅을 소재로 삼았는데 이것은 오페라를 제작할 때 자본을 제공했던 귀족들이 자신들은 오페라 속의 영웅들과 비슷한 인물이라는 신분과시의 속셈이 들어있다. 왕과 귀족들은 오페라를 구경하는 평민들에게 자신들은 오페라 속의 헤라클레스 같은 존재이니 너희들과는 근본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슬라보예 지젝·믈라덴 돌라르 공저)에서 돌라르는 "오페라는 절대주의의 축소 모형이며, 절대주의의 집에서 자란 절대주의의 환상"이라고 언급한다. 별로 볼 것이 없던 그 당시, 평민들은 귀족들의 성곽에서 가끔 베풀던 연회의 흥미진진한(그 당시에는) 환상 세계를 다시 보고 싶어 했고 수공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사람들은 평민들이 좋아하는 오페라를 무대에 올려 돈을 벌어보려 했다. 자본가들이 1637년 세계 최초의 오페라극장을 열었으니 돈을 내면 마음대로 오페라를 구경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페라가 만들어진 1600년 이후 150년 정도를 바로코(baroque)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포르투칼어 '일그러진 진주(barrocco)'에서 왔다. 이것은 작곡가들에게는 앞선 시대의 조화와 균제 같은 이전 시대정신과의 결별, 일탈을 의미한다. 바로코 시대는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진지한(serious)내용이 들어있는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의 시대인데 연기는 과장되었으며 무대장치로 귀족들의 신분과 품위를 과시하는 허장성세가 주를 이룬다. 귀족들은 말발굽 모양의 오페라극장 2층이나 3층을 요즘의 콘도 회원권처럼 구입하여, 오페라를 보러갈 때 그곳을 촛불로 장식하기도 했는데 돈 많은 귀족은 조그만 자기 코너를 1000여개의 촛불로 장식하여 부를 과시하기도 했다. 요즘 VIP석이라고 할 수 있는 1층은 평민들을 위한 소박한 의자가 놓이거나 서서보는 일반석이었다. 오페라극장의 실내는 소란스러웠고 잡담은 물론 심지어 술을 마시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 당시 관객들은 오페라의 내용보다는 가수의 목소리와 현란한 기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말할 자격이 없다"라는 성서의 기록으로 인해 무대에서는 변성기 이전의 거세된 사내아이였던 '카스트라토(castrato)'가 인기를 끌었다. 유명한 카스트라토의 개런티가 요즘 인기 있는 아이돌그룹 이상이어서 가난한 부모들이 너도나도 사내아이의 고환을 제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공한 카스트라토는 수명에 불과했다니 부모들의 욕심이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망쳐놓기는 비슷해 보인다.

바로코 시대의 오페라 세리아들은 길이가 길고 멜로디가 반복되는 '다 카포(Da capo)'의 형식을 이루고 있어서 점점 지루해졌고, 신화나 영웅의 이야기보다는 요즘의 막장 드라마 주제 같은 스토리를 관객이 원하고 있어 오페라 중간에 '인테르메초(Intermezzo)'라는 막간극을 끼워 넣었더니 심지어 이것을 보기 위해서 오는 관객도 많았다. 일본 연극 가부키나 중국의 경극도 길고 지루하여 중간에 막간극을 삽입 한다. 막간극에 대한 관객의 호응이 높아지자 더 많은 관객을 끌어 모아 돈을 벌기 위해 이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무대에 올렸으니 '오페라 부파(buffa)'의 출생비밀에 해당되는 셈이다. 부파는 이탈리아어로 웃긴다는 의미이니 권위에 대한 비웃음을 용납하지 않았던 중세와 바로크 전기시대를 뛰어 넘는 '웃음의 승리'라 할 수 있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가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뒤이은 18세기말 19세기 초에 유행한 오페라를 '벨 칸토(bel canto)오페라'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아름다운(bel) 노래(canto)라는 뜻이다. 이 시대의 오페라는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극의 갈등 구조보다는 성악가 개개인의 음악적 재능과 테크닉에 의존했기 때문에 성악가의 목소리와 기교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1842년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부터는 오페라에서 음악 못지않게 연극적 요소들이 중시되는 새로운 오페라 시대가 열리게 된다.

베르디는 이탈리아 파르마 지방의 부세토에서 태어나 26편의 오페라를 발표했는데 처음과 마지막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극이었다. 부인과 아이들이 몇 년 만에 모두 죽는 가정적 아픔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훌륭한 오페라들을 발표하여 국민들의 추앙을 받았고 잠시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유로화로 통일되기 전 이탈리아의 화폐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고 지금도 이탈리아 대도시에서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그는 목소리와 기교를 중시하는 벨칸토 오페라를 연극적 요소가 중시되는 이탈리아 오페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고전작품과 동시대 작가들의 문학작품들을 섭렵하여 그의 대표작들은 세익스피어<맥베스, 오텔로>, 빅 토르 위고<리골레토>, 알렉상드로 뒤마 2세<라 트라비아타>같은 문호들의 작품에서 소재를 구했고, 고대 이집트<아이다>, 기원전 바빌로니아<나부코>, 중세의 마녀사냥<일 트로바토레>같은 다양한 역사적 배경을 오페라의 무대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오페라에서 역사적 배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언제나 운명의 삼각관계, 아버지와 딸의 소통문제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주관성의 비극'이었다. 베르디가 역사보다는 개인의 심리와 인물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은 개인적으로 처절한 고통을 겪었던 베르디의 '운명의 힘' 덕분인지도 모른다.

바그너와 베르디는 알프스 산맥 이쪽과 저쪽에서 늘 경쟁관계에 있었다. 이탈리아어는 모음들이 구강의 앞쪽에서 발음되기 때문에 경쾌하게 들리지만 독일어는 구강의 뒤쪽에서 ㅋ, ㅌ, ㅍ과 같은 격음들이 많아 노래로 듣기에는 거북하다. 이탈리아어에 음정을 붙이면 노래가 되지만 독일어는 그렇지 않다. <겨울 나그네>, <보리수>같은 주옥같은 가곡은 독일 시인들이 일부러 아름답게 들리도록 쓴 시들에 해당한다. 바그너는 오페라에서 언어로 살릴 수 없는 부분을 음악을 통해 극적효과를 살렸으니 바그너의 명민함이 드러난 경우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적 경향을 보였던 바그너는 이탈리아 단어인 오페라라는 말 대신 '악극(Musikdrama)'이라는 독일어를 후기 오페라에 붙였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같은 작품에서 빰바밤~ 빰바밤~ 하고 울리는 음악이 여러 번 반복되고 그때마다 유령선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기법이 '라이트 모티프(Leit-motiv, 유도동기)'다. 이런 라이트 모티프는 현재 헐리우드 영화에서 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는 음악에서 천재성을 보여 주었지만 남의 돈을 빌린 후 갚지 않고, 많은 여자들과 심란한 관계를 유지하여 '괴물'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드레스덴 혁명에 참여하여 스위스로 망명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그의 음악을 나치의 정치 행사에 종종 이용하였다. 히틀러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나오는 선원들의 합창, <탄호이저>에 나오는 노래경연전당의 트럼펫소리, 전쟁의 여신인 '발퀴레'의 출정 장면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탄호이저>의 마지막 부분에 '하이힐'하며 영주(領主)의 안녕을 기원하는 부분이 '하이-히틀러'하며 손을 번쩍 드는 히틀러의 집회장면과 절묘하게 부합되어 히틀러의 교묘한 선동성을 읽게 해준다. 니체가 젊은 시절 바그너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반유태주의적이고 기독교적 회귀에 집착하는 그와 갈등을 빚고 결국 비판하고 말았다. 바그너는 <로엔그린>에서 민족주의적 경향을,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표출하데 이것은 돈과 여자 이외에 사상 면에서도 심란함을 보여준 예가 아닐까 싶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음악이 독일과 이스라엘에서 한동안 연주되지 않은 것은 그의 음악이 수준이하 이어서가 아니라 히틀러를 통한 두 민족의 아픈 '문화적 기억'(고대 이집트 문명을 전공한 독일의 문화학자 얀 아스만의 용어)때문이 아닐까 싶다.

베르디와 바그너의 치열한 삶의 궤적들이 작품으로 남아 오페라 애호가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호사를 누리기 위해서는 관객의 지적배경(신화와 전설 등)이 요청된다. 때로는 그들이 겪었던 삶의 여정도 작품 이해에 필요하기도 하다. 바그너의 작품에는 남자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헌신하는 여자의 모습이 줄곧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평탄하지 못했던 가정의 아픔이 역설적으로 작품 속에 반영되고 있지 않나 싶어 연민의 정마저 느껴진다. 가난한 현실과 가정의 비극 속에서 때로는 몸부림치며 빚어냈던 그들의 에너지 덩어리들을 만나러, 올해 한번쯤 오페라 극장을 찾는 것도 그들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유익할 듯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홍민정 2013-04-05 17:54:03
감사합니다
오폐라이야기까지 많은걸 배웁니다
200년주년 이군요
늘 따끈한 제목이 즐겁습니다
새싹들의 강인함을
봄꽃들의 화려함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삼중 2013-04-02 10:08:40
오페라의 빠른 물줄기를 따라 래프팅한 느낌입니다. 교수님 덕분에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생기는 것 같네요,고맙습니다.아직까지는 오페라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관심을 갖고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