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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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눈물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3.07.26 18:1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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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보는 것이 눈의 본질이 아니라 눈물이 눈의 본질'이라고 말한바 있는데 이것은 인간만이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서구 사유체계에 대한 그의 반성일 수 있다. 사물을 본다는 것(見)은 사물의 겉면을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사물의 겉면 저 너머를 보고 듣는다는 것(觀)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서구인들이 인간의 모든 감각 가운데 시각을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평가하고 이것을 이성적 판단의 토대로 삼아 왔는데, 왜 이제 그들은 냉정한 눈빛을 거두어들이고 눈물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데리다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 1509-66)의 「십자가 아래의 여인」에 주목한 적이 있었다. 처형당한 예수의 죽음 아래서 진정한 애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인간의 자화상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데리다의 생각을 반추하기 위해 서구문화를 거칠게 정리하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듣는 것 보다 보는 것을 통하여 삶을 이해하려 했다. 사막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히브리적 전통과는 달리 그리스 사람들은 보는 것을 통하여 철학과 예술을 발전시켰다. 그들이 조각, 연극, 기하학과 같은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에게 해(海)의 쪽빛하늘과 흰색으로 빛나는 대리석 언덕을 바라보고, 이 환경을 경탄해 맞이했을 것이고 이것을 그대로 재현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임스 휘틀리(James Whitley)는 『고대 그리스의 고고학』에서 고대 그리스를 '이미지들의 문화'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재현을 예술이라 생각했고, '미메시스'라는 모방론을 발전시킨다.

고대 그리스의 전통이 로마로 이어졌지만 중세 천년을 거치면서 신 중심 사회는 보는 문화를 무력화 시킨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이것의 표상인 음악이 강조되는 청각문화의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은 이 시기를 '암흑기'라고 스스로 평가하며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보는 문화를 재생시킨다. 그 후 유럽은 종교개혁, 산업혁명, 인쇄기구의 발명, 시민혁명 등을 통해 시각과 청각이 순위를 바꿔가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보는(見) 문화의 비교우위는 비약적으로 자연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제는 모두의 죽음을 예고하는 핵우산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게 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삶을 풍요롭게 하였지만,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더욱 생산성에 박차를 가해야만 했다. 자본은 기계와 인간을 이용하여 끝없는 무한경쟁을 시도해왔고,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같은 독일의 철학자는 과학기술문명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인간존재의 근원적 문제에 철학적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경쟁은 기술뿐아니라 삶의 방식에도 적용되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낳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 작동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무한경쟁을 해야 하며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은 도태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을 소진해야하는 '피로사회'에서 사람들은 심신의 힐링을 외치며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자신을 불태워 왔지만 갚아야 할 빚과 공허한 삶이 그들을 기다릴 뿐이다. 이것이 보는 문화(見)의 비교우위가 만들어낸 서구(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물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타자를 배제하려는 눈빛은 한계성을 드러낸다. 인드라(Indra)의 그물망처럼 타자와 연결될 때 개체도 그 관계 속에서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게임의 탈락자, 가지지 못한 자, 파괴된 환경의 반격이 시작될 뿐이다. 아직 인류의 종말이 유보되고 있는 것은 비정한 경쟁보다 타인의 고통에 진정으로 흘리는 눈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Adorno)는 '희망은… 망각된 것의 귀환'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망각된 것의 귀환'은, 무한경쟁, 첨단 과학기술, 일부 영혼 없는 정치인들의 막말과 독설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진정으로 흘리는 고귀한 눈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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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산 2013-07-27 04:35:11
몇 백년 전엔 안동에 있는 학자가 세상에 울림있는 메시지를 던지더니, 지금은 홍주에 있는 학자가 세상에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을 써서 홍주를 깨우고 있고 그 울림이 전국으로 퍼지고 있는 듯 합니다. 좋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방학 동안 책에 파묻혀 사시지 않고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반산 2013-07-27 04:28:19
변증유물론에선 具體적으로 드러나는 것 만이 살아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이성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과 눈물이 서로 하나가 되었을 때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리가 되면 살아있는 것이 되지를 못하며 생명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과 눈물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서로 간 받쳐줄 때 살아있으며 진화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덩어리라는 실체를 알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반산 2013-07-27 04:16:25
"인드라(Indra)의 그물망처럼 타자와 연결될 때 개체도 그 관계 속에서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눈물" 속에 쏙 드러옵니다.
타자와 연결될 때 그 존재가 드러난다라는 말은 변증법의 핵심입니다. 상대 속에서 존재가 숨쉬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실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변증유물론에서는 이것을 "實"이라고 하며, '實在' '切實' 등으로 말을 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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