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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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유토피아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3.04.16 11: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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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지금 먹는 사탕이 제일 맛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인간은 주어진 현실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내일에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찾는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좋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삶은 지속가능하다. 희망은 미래에서 무이자로 빌려오는 거래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그리고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 의식의 기본 형태라고 블로흐(E. Bloch)도 『희망의 원리』에서 말하고 있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은 어느 강연회에서 자신의 글쓰기 특징은 "환상성"이라고 말한바 있다. 현실에서 이루어 질 수 없는 그 무엇을 상정하여 그것을 이루어 보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소설쓰기의 원천이었다는 것이다. 밋밋한 현실 속에서 무엇인가 짜릿한 순간이 환상(幻想)이며 그 환상은 우리에게 빛의 속도로 왔다가 사라진다. 순간이지만, 그 환상이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리비도(Libido) 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폭넓은 지적(知的) 오만은 우리의 환상을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름꾼은 쓰리고에 5광의 대박을 잊지 못해 그 일그러진 환상을 연장하고 싶어 한다. 그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속도가 정확하고 빠르지 않을 때 "저 놈은 돌았어"라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그러나 길게 볼 때 어느 환상이 일그러졌는지 아닌지는 세월이 판단할 일이며, 당대와 불화하면서 자신의 환상세계를 그려낸 역사 속의 인물을 만나보는 것도 혼란한 시대에 '불편한 위안'을 삼아볼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이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늠될 것 같다(황현산, 한겨레신문 2009, 7.18)"라는 황현산의 말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 사람의 깊이와 넓이와 관련되어 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깊고 넓은 시선은 동굴의 우상(偶像)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 타인과 견주어 나의 환상이 일그러졌는지 아닌지도 그 속에서 가능하다.

『유토피아』의 작가 토마스 모어(1479-1535)는 영국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27세 하원의원, 42세 재무차관, 44세에 하원의장을 지내고 처형되기 전 3년 동안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 당시 영국의 대법관은 오늘날 총리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그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 헨리8세 치하에서 부귀영화를 누려 왔으면서도 말년에 처형당하는 수모는 자신의 "환상성"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어는 젊은 날 수도원 생활을 4년 정도 하였는데 청빈한 그 곳의 삶이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다. 그가 『유토피아』라는 소설을 써서 사유재산제도의 철폐를 그려 낸 것도 젊은 날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도시의 노동자로 전락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모어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이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을 가져왔고, 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농민의 실업과 빈곤층의 증가를 막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헨리 8세가 여러 번 이혼을 하고, 영국국교회를 만들어 정치와 종교의 수장이 되려하자 모어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유럽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도덕적 무게'가 실려 있던 인물이었으므로 헨리 8세는 영국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 그의 침묵을 받아들인다. 그러자 모어는 "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충실하고 그 의지에 따라 행동할 뿐 이 문제(왕의 결혼)에 대해서는 개입하고 싶지 않다…. 나의 침묵을 처벌할 수 없다"고 강변했지만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을 통해, 나 자신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 않을 자유는 단지 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라고하는 서구 사상의 초석이 된다. 나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 외적 압력이 커질수록 모어는 내면세계를 더욱 공고히 한다. 왕에게 굴복하라는 회유에도, 갇혀있던 런던탑이 천당에 더욱 가깝다며 끝내 거부한다.

『유토피아』에서 모어는 그 당시 영국과는 다른 세상을 그렸지만 그것은 '이상국가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을 명시하는데 있다라기 보다 현실국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로의 진입 노력을 지속하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라는 평가가 더 적절할 것 같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꿈꾸는 상상력의 진원지는 불만족스런 현실이었으며, 현실에 대한 인식이 '깜짝쇼'와 같은 일회적 이벤트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올바른 비판, 풍부한 상상력과 실천의지가 필수적임을 『유토피아』는 보여준다.

모어는 그리스도교적 수도원의 이상을 고수하면서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통치형태에 반대하는, 즉 중세적 신앙과 근대적 이성이 길항(拮抗)하고 삼투(滲透)하면서 빚어낸 환상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시대와 불화하면서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직도 그의 『유토피아』읽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 본다. 1534년 <왕위계승법>에 서명하라고 모어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리치라는 인물은 헨리8세에 영합했지만 그도 곧 형장의 이슬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현실과 유토피아는 우리의 삶속에서 늘 길항한다. 환상이라는 모양새를 현재속에서 어떻게 그릴 것인가는 자신의 세계관이다. 인간은 대개 자기의 환상을 실현하며 살아간다. 환상이라는 희망마저 없는 사회에서 인간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출구를 찾는다. '하우스푸어'(house-poor)보다 '호프리스'(hope-less)가 더 무섭다. 시대와 불화하며 자신만의 고집스런 환상의 세계를 그려내는 사람은 당대에 불행했지만 때로는 뒷사람의 등불이 되기도 한다. 세계사적 개인은 위대하나 행복하지 않았다는 헤겔의 말이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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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너랑 2013-04-18 23: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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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입니다. 김용택시인의 <편지>
교수님의 멋진 칼럼을 만날수 있었던 오늘은 제게 너무도 행복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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