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불사 주지
칼럼·독자위원
현재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는 한글은 과거에 만들어졌고, 과거로부터 배운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미래를 설계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결국 단절 없이 이어져 오는 과거의 영속이다.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고 전달되는 방식에 따라 인간과 동물이 명확히 구분된다.
모든 동물들은 삶의 경험이 몸이라는 유전자를 통해서 아주 느리게 전달하는 반면 유독 인간만은 문자와 언어를 사용해 아주 빠르고 다양하게 축적하고 전해준다. 실험실에서 갓 태어난 쥐의 같은 쪽 다리를 평생 묶어서 키우면 대가 지나면서 점차 그쪽 다리가 퇴화된 새끼들이 태어난다. 반면 처음부터 잘라서 사육한 개체들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퀴벌레는 살충제에 맞아서 죽는 순간 그 정보를 알에 품어 다음 세대로 내성을 전한다.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인 우리는 ‘호모사피엔스’라 분류되는 현생인류들과의 경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가장 큰 이유는 국가나 종교와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언어로 구성되는 개념을 통해 하나의 이념으로 뭉친 대규모의 집단을 형성해 경쟁 상대들과 싸워 이겼다. 이처럼 말과 문자는 정보축적과 전달 효율성이 뛰어남으로써 인간이 인간일 수 있도록 하는 아주 특별한 생존도구임이 분명하다. ‘필(筆)이 총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지난 호에 우리 민족은 <표의문자로서 한문>을 <표음문자로서 한글>을 가졌다고 했다. 한글이 옛 글자를 모방했다는 것은 한자의 이두식 표기와 한문을 읽을 때 토씨로 사용했던 각필구결, 녹도문자, 가림토문자와 깊은 개연성이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은 기존의 문자로 자리 잡고 있었던 한자의 한계(과거)를 개선하려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 한글이라는 놀라운 문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예를 들면 ‘돌이’, ‘어리’, ‘다리’ 등은 사람을 지칭하는 우리말이다. 갑돌이를 한자로 ‘갑돌(甲乭)’로 쓰고 ‘갑돌이’로 읽는다.
이때 돌자는 우리만 사용하는 글자다. 이 같은 글자는 논을 뜻하는 답(畓)을 비롯해 ‘~을 걸다 걸(乬)’, ‘~을 잇다 줄(乼)’, ‘~잘하다 잘(乽)’, ‘손질도구 솔(乺)’, ‘할(乤)’, ‘갈(㐓)’ 외도 많은 글자가 있다. 위에 나열한 글자들이 비슷한 형식으로 이뤄졌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글의 자모음의 조합형태가 보이기 때문이다. <巨+乙=걸>, <注+乙=줄>, <者+乙=잘>, <所+乙=솔> 등과 <石+乙=돌>처럼 石을 우리말 돌로 바꾸어 표기했고, 한자로는 논을 수전(水田)이라 표현하는데 한 글자로 합해 답(畓)이라고 했다. 이러한 과거의 축적으로 한글이 탄생됐다. 이에 반해 중국인들은 발음의 성조로서 극복하려 했고, 일본 역시 ‘히라가나’, ‘다나가나’ 등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재미있는 것은 한문(漢文)의 한(漢)자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해석과 해학이다. 한(漢)자를 일반적으로 ‘한나라 한’으로 읽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을 뜻한다. 한족(漢族)이 대륙의 주류가 되면서 이민족들을 오랑캐라 하여 융(戎), 적(狄), 만(蠻), 무(髳), 촉(蜀) 등으로 분류했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한족의 한(漢)자를 치한(癡漢), 괴한(怪漢), 악한(惡漢), 문외한(門外漢), 호색한(好色漢), 파렴치한(破廉恥漢), 무뢰한(無賴漢) 등 ‘나쁜 족속’의 의미로 대응했다.
어느 영국 기자의 경험담처럼 한국인들은 무슨 배짱으로 자신들보다 강한 나라사람들에게 ‘미국 놈’, ‘일본 놈’, ‘중국 놈’ 해가며 심리적으로는 발바닥의 때만큼도 안 여긴다는 것과 같다.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가까운 시기에 겪은 일본 식민의 영향으로 현재 우리 스스로는 약소국처럼 말하지만 세계 역사학자들은 우리 대한민국을 경이롭다고 한다.
저 나라 저 민족은 무슨 수로 저 거대한 중국에 복속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말과 글 복식 등 고유문화와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겉으로는 중국의 성(城) 하나만도 못한 나라, 미국의 한 주(州)보다 적은 나라라는 자학을 하면서도 그 골수에는 어느 민족도 꺾을 수 없는 자존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같은 자존이 식민지를 겪은 국가 중에서 경제와 민주화에 성공해 유일한 선진국을 이뤘고, 한류로서 세계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앞서 호모사피엔스 중에서도 유독 형이상학적 언어를 사용한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만 살아남았고 했다. 이것은 인류문화의 뼈대는 말과 글에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와 언어를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은 반드시 세계를 주도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음의 방증이다. 다만 국토라는 땅의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하지만 현대문명이라는 기술력으로 극복하리라는 희망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