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문화의 바탕 말과 글 〈4〉
상태바
흔들리는 문화의 바탕 말과 글 〈4〉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5.03.20 10:19
  • 호수 882호 (2025년 03월 20일)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trong>범상스님</strong><br>석불사 주지<br>칼럼·독자위원​​​​​​​<br>
범상스님
석불사 주지
칼럼·독자위원

며칠 전 ‘국제교류문화진흥원’이 기치를 들고 있는 해외관광객 1억 명 유치활동의 일환으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지냈던 이참 선생과 함께 서울 북촌길을 걸었다. 

이참 선생은 독일태생으로서 1986년 이한우라는 이름으로 귀화했다. 그는 우리문화의 철학을 자신의 이름에 담아 이참(李參)으로 개명했단다. 참(參)은 셋(三)을 뜻하는 글자로 한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숫자이며, 사람인 아래 삐침 세 개는 결국 하나로 통합돼 우리 모두가 하나로서 ‘하나님’이 된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여기에 필자는 삼(三)은 한국인의 합리성이다. 너와 내가 만나 무엇을 이룰 때 너와 내가 미처 살피지 못했거나 경험하지 못했고 알 수 없는 것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두는 것이 삼(三)의 지혜라는 생각을 덧붙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은 김치와 같다고 정의한다. 왜냐하면 김치에는 특정한 조리법이 없다. 재료 역시 (무엇이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담는다. 나와 재료가 만나 버무려진 다음 숙성은 자연에 맡긴다. 이때 ‘나’ ‘재료’ ‘자연’은 삼(三)으로서 하나가 된다. 

그런데 삼(三)으로 한국인의 기질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인의 특성은 김치를 먹는 데 있어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금방 무쳐 겉절이로 먹고, 익혀 먹고, 삭혀 먹고, 끓여 먹고, 지져 먹고, 볶아 먹고, 씻어서 쌈 싸 먹고…. 온갖 음식과 어울리다 보니 김치로서 맛이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조리법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창의적이고 변화무쌍하며 무엇과도 어울리는 음식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이와 같은 음식을 만들고 즐기는 한국인들도 이와 같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치만 그렇지 않다. 비빔밥, 볶음밥, 쌈, 명절 뒤 남은 음식 전부 넣어 끓이는 이름 없는 찌개…. 그래서 한국인들을 틀에 가둘 수도 없고 단정적으로 정의할 수도 없다.

이어진 경복궁 관람, 풍수지리에서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이 투영된 건축양식과 조형물 등에 대한 이참 선생의 해박하고 놀라운 설명을 들었다. 필자는 여기에 “우리나라 궁궐은 특별한 방어시설이 없으며 왕의 거처가 노출돼 있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도 찾아볼 수 없는 궁궐의 양식”이라고 덧붙였다. 

유럽의 성들은 물론 가까운 일본에까지 군주는 백성들의 반란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철저한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고 왕의 거처는 접근 자체가 어렵게 설계돼있다. 방어개념이 없는 궁궐구조는 우리 민족의 특징으로서 군왕과 민중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대답으로 이참 선생은 “조선의 군주들은 언제나 백성들과 소통하려 노력했다. 효자로 알려진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참배(화성행궁)를 비롯해 66차례 행행(行幸)이 있었고 3355건의 상언과 격쟁을 처리했다(백성이 임금에게 직접 글을 올려 민원을 제기하는 상언과 글을 모르는 백성이 징이나 꽹과리를 치고 나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이 있다)”며 보충설명을 보탰다.

세상 어느 나라에서 절대군주가 지나가는 길에 감히 백성이 징을 치며 가로막고 서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스스로 왜곡해 이렇게 멋진 사실들에는 까마득하고, 머리를 땅에 처박고 절절매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문화의 바탕이 되는 우리 말과 글에서도 스스로 낮춰 천대하는 통에 아름다운 표현들이 사전 속에서도 사라졌다. 이날 함께 하신 분 중에서 우리 문화의 글로벌화를 위해 영어사용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기에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당장 거리의 간판에서부터 영어(외래어)를 사용해야 ‘뭔가 있어 보인다’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다! 정말로 세계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말과 글을 더욱 사랑하고 가꿔야 한다. 말(글)이란 그 집단의 경험과 개념의 표현이다. 예를 들면 ‘불’은 <연료+무엇들=불>이 된다. 여기에서 ‘연료’와 ‘불’이라는 말은 있지만 ‘무엇들’에 해당하는 수많은 조건에 대한 구체적 명사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 속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무엇들’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우리말은 형용사가 발달돼 있다. 말이 있다는 것은 거기에 합당한 대상과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어 옐로(yellow), 한자 황(黃)에 해당하는 노란색을 우리말은 노랗다, 누렇다, 샛노랗다, 누리끼리하다, 노르스름하다, 누르스름하다, 노리꼬리하다 등으로 구분한다. 심지어 흰색도 희다, 하얗다, 새하얗다, 허옇다 등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이 땅 우리 민족의 눈과 감성에는 그렇게 구별되고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뛰어난 말과 글의 이면에는 남다른 민족의 특성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버리면서까지 무엇을 위해 세계화를 하겠다는 말인가. 말이 바뀌면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이 달라지니 세계화가 아니라 스스로 그들의 종이 되겠다는 게 아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