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 연구자께서 기사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9년차 어린이집교사가 학부모들의 문해력을 걱정하는 글이었다. ‘비가 올 때’라는 뜻의 ‘우천시’를 어느 지역의 도시로 이해해 위치를 되묻고, ‘점심을 주겠다’는 의미의 ‘중식 제공’에 중국음식보다는 한식(韓食)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을 금하다’의 ‘금’을 금(金)으로 착각해 ‘가장 좋은 것’으로 알아듣고, 오늘이라는 ‘금일’을 금요일로 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해도 되지만, 하지 않는 것을 권장해 드립니다’ 했더니 하라는 것인지 하지 말라는 것인지를 헷갈려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심지어 대학생이 구두경고를 ‘구두 신고 발로 찬다’고 알아듣는다는 심각한 기사였다.
몇 해 전에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들에게 현충일을 물었더니 한 녀석 손을 번쩍 들었고 ‘벌레 잡는 날’이라는 황당한 대답에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같은 일들은 젊은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문제이며, 사회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말과 글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뛰어난 소통도구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오늘날 인간이 지구 최강이 된 것은 언어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파악한다. 돌고래처럼 짐승들도 언어로 소통한다. 이것은 현재 처한 상황에 대처하는 단순한 신호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유독 사피엔스 종(인간)의 언어는 지나간 상황과 사건을 묘사하고 미래의 약속이 가능하다. 그래서 사냥을 할 때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 너희들이 잠복하고 있으면 우리가 그쪽으로 짐승을 몰아가겠다’는 식의 약속이 가능했다. 이 같은 소통으로 인간은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으며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됐다는 것이다. 만약 사피엔스가 이러한 언어를 구사하지 않았다면 신체적으로 월등히 크고 강한 힘을 가졌던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들의 유전자에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이 남아있어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인간은 소통으로 신체적 한계를 극복했다. 앞선 기사의 걱정처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 ‘출입을 금하다’라는 팻말의 문구를 금(金)으로 착각해 덥석 달려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위급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긴밀한 소통으로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이미 눈앞에 닥쳐있는 현실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양문화의 바탕이며 우리 민족으로부터 시작됐고 우리 언어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한문은 중국글자라며 멀리하는 반면 지나친 영어 사용으로 혼란을 가중시킨다. 여기에 대해 박노자는 과거 지배층들이 한문을 통해 특권을 유지했듯이, 서세동점 이후 영어로써 새로운 특권층을 형성했기 때문에 생겨난 대한민국의 병폐라 진단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가운데서도 우리 스스로 우리 말과 글을 천대하는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이 같은 참담함을 토로하는 걱정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어를 사용해야 있어 보인다”고 답한다. 이미 속담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다. 영어 사용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고 유식해 보인다는 착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어든 문화의 굴종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굴종은 노예근성이 만연했음을 말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일상이며 모범으로 자리 잡은 사실은 참으로 서글프다.
더 큰 문제는 영어를 사용해야만 (한류)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심각한 착각이다. 대한민국을 종주국으로 해 전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태권도의 예를 들어보자. 일제강점기 동안 대한민국의 무술들은 단절됐거나 정체성을 잃었다. 태권도는 해방 이후 일본가라테의 원조인 중국 남파권법을 익혔던 무덕관창시자 황기를 비롯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워온 송무관, 청도관 등으로부터 우리 무술로 복원됐다. 필자가 태권도를 처음 시작할 때 가라테의 ‘헤이안’, ‘밧싸이’, ‘나이핫지’라는 형(型)를 익혔던 기억이 있다. 이후 당수도, 수박도 등으로 불리다가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다. 형을 품새, 대련을 겨루기 등 모든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고, 태극기가 나타내고 있는 사상을 담아 태극품새, 고려, 금강 등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태국 선수가 예의, 염치, 인내, 극기, 백절불굴이라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담은 태권도 정신으로 감독에게 절을 올렸다. 경기에 사용하는 차려, 경례, 갈려 등의 태권도가 우리말을 통해 세계화를 이뤘음에 주목해야 한다.
태권도의 세계화는 용어를 우리말로 새롭게 정립하면서 시작됐다. 만약 지금도 ‘헤이안’, ‘밧싸이’, ‘나이핫지’라고 한다면 어찌됐을까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 본다.
범상스님 <석불사 주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