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천노인대학장, 칼럼·독자위원
유난히 긴 폭염이 계속되지만 배움의 전당인 초, 중, 고, 대학에 이어 노인대학도 다시 배움의 문을 열었다.
지난 8월의 마지막 날 홍성군청 대강당에서 ‘일농(逸農) 서승태(徐承台) 선생(1854~1919)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역시 충절의 고장이요, 인물을 많이 배출한 홍성답게 이에 관심이 있는 많은 분이 참석했고 이날 배부한 유인물에 의하면, 서승태 선생은 광천읍 상정리 773번지에서 출생해 대한민국이 무너진 시기에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을 통해 후손들에게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임을 알게 됐다.
1908년에 광천읍 상정리 덕정마을에 자신의 사재를 희사해 덕명학교를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교명인 덕명(德明)은 4서3경의 하나인 대학에 “‘명명덕(明明德)’으로 밝은 덕을 밝힌다”에서 밝은 덕성을 기르는 배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분의 훌륭한 업적을 목격하지 않은 처지에 열거할 수 없어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개교에 대한 부분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개교는 교육이요, 교육은 인재를 육성하는 성스러운 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에밀》를 쓴 루소도 “모든 기술 중에서 가장 유용한 기술은 교육이다”라고 했으며, 교육은 한 개인이 갖고 태어난 재능을 캐내는 광부와 같다고 한다.
광산에서 광부가 오랜 시간 절차탁마해 금석을 발굴하는 작업에 비유하는 것처럼 교육은 그야말로 심혈(心血)을 기울여야 하는 활동이다.
개교는 학교의 설립이기에 필자도 1958년 4월 23일에 풀무학교 제1회로 입학했던 한 증인으로 편린을 피력하고자 한다.
우선 교명이 ‘풀무’인데 이는 학교가 서 있던 골짜기에 대장간이 있어서 녹슨 쇠를 용광로에 넣어 새로운 도구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빈약한 사상과 더러워진 양심과 무딘 영혼을 신앙의 불꽃으로 거듭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풀무 교육의 사명이었다. 이에 홍동 지역에 계신 주옥로 선생은 개인 사재를 희사해 학교 건물을 세우며 신앙의 초석을 서울의 이찬갑 선생은 기미 독립 선언 33인 중에 한 분인 이승훈의 종손으로 민족정신을 주창하는 두 분이 쌍벽을 이루게 됐다.
결국 1908년에 설립한 덕명초등학교는 말할 나위 없고, 1958년에 개교한 풀무학교도 얼마나 험난한 고갯길이었는지는 감히 회상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인 1958년 풀무학교 초창기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역경의 연속이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어디에 비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학교의 교육이 없었다면 지금 어떠한 처지에 어느 인간이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 학교가 얼마나 고마운지 말할 수가 없다.
이에 그토록 소중한 그보다 성스러운 개교를 하신 전국의 국공립은 말할 나위 없고 사학의 설립자 스승님들께 깊은 찬사와 존경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풀무 개교의 여러 가지 일화 중에 한두 가지 예를 들면 격세지감으로 현재의 시각으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 사실 중에 학생의 수업료와 교사에게 드리는 봉급을 돌이켜 보고자 한다.
그 당시는 경제적인 빈곤으로 수업료를 1학기는 보리 한 가마, 2학기는 벼 한 가마를 남학생들은 지게에 지고 등교했고 여학생은 학부모가 지고 오셨다. 결국 교사 봉급도 전체 모인 보리나 벼를 몇 분 교사에게 평등하게 몇 가마씩 나눠 드리는 것이 급여의 전부였다.
그리고 배움에 굶주린 자녀가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자식에게 기름값이 아까워 잠을 자라고 독촉했던 부모도 있었다.
이쯤 해서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말이 생각나는데 과거에는 열악한 환경에 반딧불을 모아서 그 빛이나 눈빛으로 책을 읽고 공부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는 너무나 편리한 시설과 풍부한 교재에 가슴 깊이 감사하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등잔불에 감사하면 전깃불을, 전깃불에 감사하면 태양 빛을 준다”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현재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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