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 31 >
상태바
온 세상이 내 것 같아요 < 31 >
  • 한지윤
  • 승인 2013.11.14 15: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민기자가 쓰는 청소년소설

호의를 가득 담은 미소와 걱정을 함께 담은 얼굴로 미라가 현우에게 다가갔다.
"별일 없었니?"
갑자기 튀어나와 생글거리는 미라와 맞닥뜨린 현우는 대답도 않고 무표정하게 미라를 앞질러 걸음을 빨리 했다.
처음 전학온 날부터 미라의 눈길을 느끼고 있는 현우였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보내오는 미소, 종호네 패거리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여왕이라도 된 것처럼 끼어들어 참견하던 일, 그것이 자신의 관심을 끌려는 얄팍한 의도인 걸 현우가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실없는 계집애."
현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런 종류의 애는 질색이었다.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 그렇고 그런 애들과 어울려 다니는 겉멋들린 계집애 눈에 자신이 비슷한 부류로 보이는 것이 혐오스럽기조차 했다.
"걔네들이 뭐라고 했니?"
현우의 무시에 자존심이 상하는 걸 억지로 눌러 참으면서 뒤따라 걷던 미라가 다시 물었다.
현우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미라를 보라보는 그의 얼굴에 경멸의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귀찮게 굴지마."
차갑게 한마디 내뱉고 돌아선 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생처음 남자애에게 무시당했다는 비참함에 자신의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나와 저만치 걸어가는 현우의 뒷모습이 뿌옇게 보였다. 괜히 말을 걸었다는 후회와 서글픔이 엄습해왔다. 한참을 잠자코 서 있다가 앞을 보니 현우가 사라진 골목이 뚜렷하게 보였다. 미라는 괴로운 생각을 잊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얼마를 뛰었을까. 미라는 '맥주·양주'라는 간판을 앞세운 초라한 문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갖가지 색의 전구가 달려있는 문은 방음을 위해 두꺼운 스펀지로 싸여 있었다. 아직 영업시간이 안 돼서 그런지 문지기처럼 버티고선 스피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문 안쪽으로 귀를 기울여 보니 유행가를 흥얼거리는 졸린 듯한 여자의 목소리만 낮게 새어나왔다.
지나가던 남자들이 저희들끼리 수군대며 미라를 훔쳐보았다. 그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이고 빼꼼히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허연 다리를 드러내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미라는 얼른 고개를 밖으로 뺐다. 안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갈까?' 맞은편 페인트 가게 앞에서 어떤 남자가 간판글씨를 쓰는 광경을 무심코 바라보며 망설이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낯익은 미스 김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슴까지 깊이 패인 검정 원피스를 입은 그녀에게서 화장품 냄새가 역겹게 풍겨왔다.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짙은 화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푸석푸석한 술독이 찌들어 있었다.
오른손 두 손가락에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끼고 미라를 흘끗 쳐다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마담 언니! 미라 왔어요."
'마담언니'라고 엄마를 부르는 소리를 듣자 미라는 이곳에 온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점잖지 못하게시리.'
그녀는 심사가 뒤틀려서 옆에 놓여 있던 간판을 괜히 발로 툭 찼다. 얻어맞은 간판이 흔들흔들 쓰러질 듯 하다가 섰다.
"왜 간판은 발로 차고 지랄이야?"


…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