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떼어낸 꽃잎들을 잘게 찢어내어 손으로 비비며 먼 산을 바라보는 강선생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건 다 옛말이 되었죠. 요즘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예요.”
잘게 부수어진 꽃잎들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빚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의 말에 강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선생의 눈에 소영의 한탄은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바로 3년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부임했을 때 새로 사서 입은 와이셔츠의 파르스름한 빛깔만큼이나 사도(師道)에의 자부심으로 꽉 차 있을 때였다.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동료 교사들의 물욕과 눈치에 찌들은 얼굴을 보고서도 환멸보다는 자신의 임무를 상기하며 어깨를 으쓱하던 기분은 6개월이 못가서 여지없이 박살이 나고 말았었다. 2, 3개월 차를 두고 발령을 받아왔지만 같은 학번이라는 이유로 퇴근 때마다 포장마차에서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던 동료 두 명은 끝내 1년을 못 채우고 차례로 사직서를 던지고 말았었다.
외톨이가 되고난 강선생은 급속도로 무너졌었다. 술을 마시면서도 눈빛을 빛내며 현실의 부조리를 토로하던 기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두 명의 동료들처럼 훌훌 떠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만을 한탄하기 일쑤였다.
뾰로퉁하게 상기된 소영의 얼굴을 슬쩍 건네 본 강선생의 심정은 착잡했다. 지극히 당연하고 올바른 소영의 문제의식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무기력해진 소영의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마음이 아파왔다. 동시에 잠자던 의식을 일깨운 젊고 발랄한 후배교사의 모습이 후덥지근한 여름날 산속에서 맞는 바람처럼 신선하게 느껴져왔다.
“민선생, 일 다 끝났으면 얘기 좀 합시다.”
반대편 끝에서 교무주임이 소영을 부르는 소리가 군데군데 자리가 빈 교무실을 울려왔다. 소영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고는 알약만한 빨간 꽃잎 덩어리를 쓰레기통에 버리며 일어섰다.
“민선생!”
잠자코 있던 강선생이 자리를 뜨려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그 생각 버리지 말아요.”
눈빛을 마주 바라보지도 못하고 들릴 듯 말 듯 내뱉는 소리였다. 간단한 말이지만 실천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아는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상대방을 일별하고는 벌써 서너 명이 모여들고 있는 교무주임의 자리로 향했다.
진영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3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학생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작년만 해도 방과 후에 남아서 공부를 하고 가는 아이들이 한 반에 대여섯 명쯤은 있었는데 종호네 패거리들이 활개를 치면서부터는 모두들 귀가를 서두르게 되었다. 늦은 시간에 외따로 길을 걷다가 돈을 털린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신고조차 하는 아이가 없었다. 보복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진영은 교문에서 약간 비켜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슈퍼 앞에 서서 목을 빼고 교문 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가 이렇게 길지?”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교문을 쳐다보고는 책을 꺼내들었다. 하얀 겉표지가 손때로 새까매진 하이네의 시집이었다.
진영은 마지막 구절을 속으로 되풀이하며 사르르 눈을 감았다. 작가의 벅찬 감동이 그대로 전해오는 것 같았다. 단 하나도 버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단어들과 그 단어들이 연출해내는 조화는 정교하게 짜여진 수예품을 보는듯했다. 무엇보다도 진영이 그의 시를 애송하는 것은 모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작가의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애정 때문이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