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기념한다니 정든집 기꺼이 내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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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기념한다니 정든집 기꺼이 내줬죠”
  • 김혜동 기자
  • 승인 2014.02.06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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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생가 전 소유주 홍북면 중계리 이승호 씨

고암과는 먼 친척이 됩니다 조부가 소유하며 살게됐죠
화백과는 직접 본적 없으나 설 때면
수덕사 계신 여사께 인사드리곤 했죠, 미인이셨고
새마을운동 당시 집을 개축해
예전 생가는 어렴풋 기억날뿐
그래도 일가 기념관 만드니 뿌듯

“낡은 초가집이었어도 삼대가 모여사니 다복하고 정겨웠었어요. 60여 평생을 살아온 집이었는데 떠나려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그래도 군에서 대대적으로 우리 친척일가 중 한분을 기념한다고 하니 좋은 일이라 여겨 정든 집을 내어주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랫동안 그분을 기릴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참 뿌듯합니다.”
이승호(73·홍북면) 씨는 지난 2007년경 고암 이응노 생가의 출생지를 놓고 홍성군과 예산군 사이에 일었던 공방을 종식시킨 이다. 당시 이 씨는 98년 전에 제작된 이 화백 일가의 족보를 공개하며 고암이 홍성 동막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이 씨가 보유하던 전의이씨 족보가 공개되자 논란은 순식간에 사그러들었고 고암의 고향은 홍성이라는 것에 종지부가 찍혔다.
고암과 같은 전의이씨로 고암과는 먼 친척뻘이 된다는 이 씨는 당시 고암의 생가로 밝혀진 집의 소유주기도 했다.
홍성군의 구 토지대장에 홍천면 중리 386번지로 기록된 생가는 이근상이 1914년 10월 24일(고암 11세) 일본인에게 팔아 생가의 소유권이 이전됐다가 다시 한국인 정영손 씨 등에게 매매되고 마지막으로 이 씨의 조부인 이광세 씨가 소유하게 됐다.
이 씨는 명확하진 않지만 생가의 예전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현재 유일한 인물이다.
“어릴적 기억이라 어렴풋하지만 그 때에는 방 2칸, 부엌 1칸, 툇마루가 있는 초가집이었어요. 토방 높이가 어린아이 허리정도였고 그 위에 마루도 허리만큼 높았어요. 당시에는 살만한 집이긴 했는데 새마을운동 당시 집을 새로 개축해서 기념관이 들어서기 전에는 옛날 모습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본래 생가에 대해 알고 싶다면 고암의 작품인 ‘고향집’과 ‘어머니’를 참고하면 좋아요. 예전 생가의 모습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죠.”
이 씨는 고암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으나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박귀희 여사와는 몇 차례 왕래를 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매년 설이 되면 할아버지께서 수덕사에 계신 여사께 설인사 드리러 가라고 시키셨어요. 몇 년을 그렇게 다녔던 것 같은데 갈 때마다 자상하게 챙겨주셨어요. 얼굴도 미인이셨고.”
이 씨는 기념관이 들어서기 전까지 지금 복원된 생가 인근에 위치한 본래 생가에서 살다가 기념관 건립이 시작된 2009년도에 지금의 중계리 홍천마을로 이주해 살고 있다. 부모, 형제들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인데다 느즈막히 귀향해 새롭게 터전을 일군 시점이어서 홍천마을로 이주를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 망설였단다. 옛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던 이 씨는 고단했던 지난 삶을 회상하며 먹먹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바로 밑에 동생이 고등학교 시절에 도망을 간 적이 있었어요. 2년 만에 다시 돌아왔는데 집에 돈을 벌 사람이 저 밖에는 없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과 동생을 남겨두고 무일푼 서울행을 택했습니다. 과자공장, 사진관, 제약회사 수금사원을 하면서 힘들게 돈을 벌었습니다. 와중에 아내도 만나 결혼도 했는데 고생하는 아내가 어느 순간 너무 안쓰러운 거에요. 마침 아버지도 연로하셔서 고향서 같이 살자하시기에 10여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홍성으로 내려왔어요.”
평생 머무를 요량으로 집과 주변을 가꾸고 농사도 크게 짓기 시작했다는 이 씨는 지난 1997년 경 중계리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서자 “이응노 화백이 태어나신 곳 바로 뒤에 쓰레기매립장을 만들면 되겠느냐”며 저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기념관 건립계획이 세워지자 생가에 살고 있던 이 씨는 반가움과 아쉬움의 교차 속에서 어렵게 이주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때 담당 공무원이었던 공필재 주사가 삼고초려하며 부탁하는데 감동해서 결정을 내린 거라고 보면 되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은 처음 봤어요. 어쨌든 기념관과 생가가 잘 복원돼 명소로 인정받고 있으니 후회는 없어요.”
이 씨는 농사일 틈틈이 기념관 주변 환경미화를 위한 공공근로에 참여하며 소일거리를 돕고 있다. 복원된 생가 툇마루에 앉아 볕을 쬐는 시간도 이 씨에게는 옛날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기념관을 통해서 마을이 발전되는 일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참여하고 싶어요. 또 농사꾼으로 살아왔으니 열심히 농사도 짓고.”
고암의 생가에서 평생을 보낸 이 씨의 일화는 기념관 특별전 ‘홍천마을엔 별도 많고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때 고암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늘 그랬듯 소박한 농사꾼으로 남아 밤하늘에 빛나는 잔잔한 별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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