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사내의 죽음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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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사내의 죽음에 대한 생각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4.04.17 14:5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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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복거일(68)이 최근에 펴낸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라는 다소 긴 제목의 소설은 주인공 현이립이 간암 판정을 받았지만 글쓰기를 위하여 항암치료를 거부한다는 내용이다. 소설에서 현이립은 단순한 생물학적 삶의 연장보다 글쓰기라는 작가의 소명의식에 가치를 두고 담담히 글 쓰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작가 복거일과 닮아 있다. 복거일도 간암으로 판정을 받은 이후 치료를 거부하며 글쓰기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분명히 찾아오는 일이지만 현이립이나 복거일처럼 암 치료를 거부하며 일상의 삶을 그대로 영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소설 속의 현이립도 “삶이 최악의 경우를 맞이했는데, 바뀐 것이 없는 듯 일상적 행위를 그대로 한다는 것이 영 서툴렀다”라고 죽음 앞에 흔들리는 내면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남의 일 같기만 했던 죽음이 갑자기 나에게 찾아 왔을 때, 현이립처럼 다가올 죽음을 통해 그 반대편에 있는 삶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을까?

대체로 작가는 예민한 더듬이를 가지고 죽음 속에서 삶을 건져내는 작업을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모리스 블랑쇼(1907-2003)는 “작가는 심연과도 같은 자신의 죽음과 해후(邂逅)하는 자”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450년 전에 태어난 셰익스피어(1564-1616)도 ‘햄릿’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며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있다. “사느냐,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이 독백에는 삶과 죽음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이해하려는 데서 나온 햄릿의 갈등이 잘 드러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의 뒤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공포를 느끼기에 때로는 힘든 삶을 마감하려다가도 돌아서게 된다. 햄릿도 “한 번 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미지의 나라가 사람의 결심을 망설이게 하는 것.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저 세상으로 달아나느니 차라리 이대로 이세상의 고통을 참고 견디게 하지”라고 읊조린다. 즉 죽음 너머가 두려워 “좌절한 사랑의 고통, 늑장 부리는 재판, 오만방자한 관리들, 덕망 있는 사람이 소인배에게 받는 그 모욕”을 참아 내야하고, “오래 사는 재앙”을 겪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환언하면 죽음의 공포가 존재하기에 누구나 이승의 삶에 연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그 공포와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한다.

‘죽음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살아 생전 법정 스님은 ‘천화(遷化)’라고 머뭇거림 없이 답한 적이 있다. 천화는 불교에서 이세상의 교화를 마치고 다른 세상의 교화를 위하여 떠나가는 고승(高僧)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다. 때때로 고승들이 저 세상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주변을 정리하고 새벽녘에 쥐도 새도 모르게 높은 뒷산으로 사력(死力)을 다하여 올라가 죽는 방식이다. 육신은 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고 뼈들은 세월을 두고 자연의 부분으로 환원될 것이다. 법정은 이런 죽음을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듯 싶다. 그러나 법정은 폐암에 걸렸을 때 외국에 나가 수술을 받았다. 질병에 걸렸을 때 적극적 치료를 받고 생물학적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천화보다 인간적일 수 있다. 이유없이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자살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복거일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저를 보고 암 치료를 안 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암이 발병하면 당연히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라서 치료에 들어가면 체력이 약해져 다시 글을 쓸 수 없을 상황이 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을 한 겁니다. 제발 잘못된 정보가 나가지 않도록 신경 써 주세요. 저 살날 얼마 안 남았어요.”라고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선택을 강조하지만 내면에는 작가라는 소명의식으로 꽉 차 있는 듯싶다. 창조적인 글을 쓸 수 있는 나이의 한계선을 스스로 70세 정도로 정해 놓고 얼마 남지 않은 작가로서의 삶을 링거병을 매달고 낭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은 날들이 점점 소중해지고 다가오는 죽음이 끔찍하지만, 희망이 없어 기댈 곳도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 편하다는 생각을 복거일은 현이립을 통해 밝히고 있다. 희망엔 불안이 따르는 법이니 오히려 절망이 가장 확실한 마음의 평안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복거일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속의 현이립의 삶은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와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한다. 죽음의 선고가 내려질 때, 나는 복거일처럼 절망에 기대니 마음이 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복거일의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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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민정 2014-04-24 12:46:20
교수님 아주 많이 아프시지요.
그리고 부끄럽구요.
저는 고3아들 고1딸이 있습니다.
논단의 내용과 조금 다른 글을 쓰고 있음을 이해 해 주시겠지요.
부끄럽고 챙피해서 지성인을 잦아 왔습니다. 이시대의 지성인이신 교수님깨
잘 났다고 살아온 시간들을 반성하며 참회합니다.
이 봄날...결코 잊지 못하는 봄날이 절대로 잊으면 안되는 봄날인데
어찌해야 하는지...절규하는 분들 앞에 사치한맘인지를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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