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 정체성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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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정체성의 회복
  • 범상 석불사 주지 칼럼위원
  • 승인 2014.07.10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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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한국인들은 ‘저’로서의 ‘나’와 상대를 인식하고 함께하는 우리로서의 ‘나’가 있으며, 쪽(저)은 우리를 이루는 최소단위이다. 그래서 ‘쪽팔리다’는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동이 남에게 들켰을 때 느끼는 수치심과, 임자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으로 나누며, 쪽발림은 마치 고깃덩이에서 뼈를 발라내 듯 외부로부터 자존감이 박탈당했을 때를 의미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쪽팔림과 쪽발림에 무감각해지고 길들여지면 노예근성이 된다. 호국보훈의 달이었던 지난 6월은 호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를 상기하고 참전용사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있었고, 거리 곳곳에는 펼침막들이 내걸렸다.

그런데 대부분의 펼침막은 ‘종북좌빨을 척결하자’는 원색적 내용이었다. 국가안보는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한다. 그러나 6·25발발 6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종북좌빨을 척결하자’는 구호가 국가안보와 애국으로 포장되는 것은 깊이 재고되어야 한다. 고구려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우리민족은 대륙의 패권질서에 완전히 종속되었고, 고려 말 몽고의 지배에 이어 조선의 왕들은 중국황제의 재가라는 쪽발림을 감내하며 첫발을 내딛어야만 했다. 이 같은 사대(事大)를 근본으로 하는 조선은 출세를 위해 상국(上國)의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할 수밖에는 정치구조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통일신라이후 지금까지 1000년이 넘도록 이 땅에서 출세하려면 내 민족, 내 나라, 내 부모, 내 형제들의 안위와 행복보다는 상국에 아부해야하는 수치스런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홍성이 낳은 걸출한 인재 남당 한원진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호락논쟁은 (멸망한)명나라를 계승하는 조선이야 말로 세계에서 유일한 중화라는 대의명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이 위정척사로 이어져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질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호락논쟁은 겉으로는 성리학의 이(理)와 기(氣)의 차별성에 근거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을 쟁점으로 하는 수준 높은 학문적 논쟁이었으나, 근본적으로는 ‘약소국은 상국을 섬겨야한다’는 사대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남당은 성리학에 근거한 명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중국의 새로운 패권국인 청나라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 이처럼 지난 호에서 말했던 대쪽 같았던 선비정신도 오랜 시간 길들여진 사대라는 쪽팔림에 저항하기 보다는 학문을 근거로 정당화 했거나 국제질서 앞에서 무기력했으며,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근본으로 한 외세(서구,일본)에 대한 저항이었으니 한 번 잃어버린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본다면 일본의 식민을 찬양하는 뉴라이트와 문참극(문창극)류의 발언의 배경에는 아마도 “우리는 지난 1000년간 상국이 바뀔 때 마다 그들에게 아부하며 살아 왔는데……왜 나 만 가지고 난리야”라는 억울함이 있는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이 상국에 아부하여 출세의 길을 찾았던 것처럼 힘없는 백성들은 사회정의와 공동이익 보다는 힘과 권력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것을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명분에서는 효와 충을 목숨처럼 여기면서도 현실에서는 무엇에 홀린 것 마냥 “종북, 좌파척결”을 외치며 내 민족을 내손으로 때려잡겠다고 나서는 반면 정작 일본과 미국에 아부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들에게는 순한 양이 되는 다중적 행동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광복 69주년을 맞는 지금, 위안부소녀상을 창녀로 패러디한 민망한사진이 SNS를 타고 전 세계로 퍼지고 있는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패권국과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우리끼리 물고 뜯고 살아온 쪽발림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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