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을 알릴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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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을 알릴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 장윤수 기자
  • 승인 2015.08.2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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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이야기-시영배 문화관광해설사

시영배 씨는 홍성을 대표하는 얼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간 6만여 명이 방문하는 국내 주요 보훈유적지인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의 문화관광해설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야 생가에서 장군의 시를 읊조릴 때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그는 홍성읍 조양문 옆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죠. 그 어렵던 시절에 유치원을 다녔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요. 친구들은 나무로 만든 신발인 ‘게다’를 신고 다녔는데, 저는 구두를 신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시영배 문화관광해설사.

시 씨는 과거 조양문 옆 대 가옥에서 자랐는데, 8남매 중 자신이 제일 말썽꾸러기였다고 말한다. 시 씨의 연년생인 형은 공부를 곧잘 했지만, 시 씨는 공부보다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했고, 어린 시절 유네스코에서 주최한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특선 수상자에게는 금시계와 일제 붓, 치약만한 채색물감 등이 상품으로 주어졌다고 한다. “특선 표창장이 손바닥 만했는데, 그걸 교장선생님이 직접 서울까지 가서 받아오셨던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 주실 때에도 하도 작아서 한 손으로 들고 읽으시는데 옆에 있던 친구들과 킥킥대며 웃었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러나 시 씨의 아버지는 그런 시 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공부나 할 것이지, 그림을 그린다’며 붓을 꺾어버렸고, 이후 시 씨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됐다. “아버지는 워낙 엄격하신 분이셨습니다. ‘세상없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죠. 저희 자식들에게는 무엇보다 정직하게 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항상 말씀하셨고요. 그래서 저희 형제들은 지금까지도 모두 아버지의 정직함의 원칙만은 끝까지 고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어 시 씨는 “아버지는 걸인이 집에 찾아오면 한 번도 그냥 돌려보내신 적이 없었다”면서 “걸인을 위해 밥을 차리는데 절대 따로 차려선 안 되고 식구들이 먹는 상에서 같이 먹게 했다”고 회상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셨죠. 큰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셔서 큰 집 식구들이 저희 집에 와서 살게 됐는데 어머니는 우리 식구들이 굶는 한이 있어도 큰 집 식구들에겐 쌀이나 보리가 떨어지지 않게 챙기셨던 기억이 납니다.” 시 씨의 아버지는 사진관을 운영했고, 어머니께는 다방을 운영했다. 시 씨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다방에서 팔던 ‘우거리 커피’나 계란을 넣어 만든 ‘모닝커피’가 기억에 난다”고 말했다.

시 씨는 홍성고를 졸업하고 우연치 않게 군대에 입대하게 됐다. 군대에 가는 선배들과 당구를 치고 배웅해주러 입영열차에 올랐다가 내리지 못해 그만 논산훈련소까지 따라가게 된 것이다. 입대자 명단에 없는 시 씨와 시 씨의 친구를 보고 간부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고, 시 씨는 ‘자원입대하러 왔다’고 말해 급작스레 군에 입대하게 됐다. 시 씨는 군대에서 태권도 교관으로 복무하며 해병대UDT에 위탁교육을 나가기도 했고, 월남으로 파병까지 나가게 됐고, 월남에서는 동료들이 갑작스러운 전투에서 전사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시 씨는 전역 이후 택시 운전을 하다가 군청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됐고, 홍주의사총관리소장 등을 역임한 뒤 지금의 문화관광해설사 일을 하게 됐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와 기념관을 지키며 홍성을 알릴 수 있어 늘 감회가 새롭고 행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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