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꽃다운 청년을 흰머리 노인으로 바꿔놔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눈앞에 다가왔다. 추석 가족과 친지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생각에 설레는 시기다.
흥겹고 기쁜 추석에도 만날 수 없는 가족 생각에 비통해하는 이들이 있다. 분단으로 가족 친지들과 생이별한 실향민이다.
살 같은 세월은 스물여섯 꽃다운 청년을 흰 머리 덮어쓴 노인으로 바꿔 놨다.
“1남 3녀 중 막내였는데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환갑을 맞으셨으니 지금으로 쳐도 굉장한 늦둥이였지. 어릴적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사탕 사달라고 떼를 쓴 것이 생생한데…”
황해도충남지구도민회 손천일(86·홍성읍) 회장의 머릿속에는 고향인 연백군의 풍경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곡창지대인 연백평야 너른 들은 쌀과 잡곡 생산량이 많고 질도 좋았다.
손 회장은 “연백군은 38선으로 남북이 나뉘었지만 초기만 하더라도 왕래가 자유로워 당시에는 이렇게 단절돼 갈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고향인 황해도 연백군에서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돼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됐다. 이후 인민군을 탈영해 국군에 투항한 손 회장은 1953년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 때 논산수용소에서 풀려났다. 당시 UN군과 사전 동의가 없었던 반공포로 석방이라 미군이 석방을 막아 탈주에 가깝게 수용소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논산에서 결혼한 손 회장은 1969년 홍성으로 이주해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며 무탈하게 6남매를 키웠다.
손 회장은 “명절을 앞둬서인지 가요무대에 고향생각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나도 모르게 고향이 떠올라 끝까지 보게됐다”며 “젊어서는 먹고살기 바빠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런 때는 고향과 부모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고 말했다.
분단 이후 손 회장은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 했지만 1983년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10살 위 누님과 감격의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손 회장은 “누님은 외국인과 결혼해 미국에 거주하고 계셨죠. 방송을 통해 소식을 알게 돼 만날 수 있었는데 부모님을 고향에 두고 혼자 살겠다고 왔다는 것이 죄송스러워 용서를 구했습니다”고 말했다.
분단 이후 먹고 살기 바빠 고향과 부모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손 회장에게는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손 회장이 고향 연백을 떠났을 당시 아버님의 연세는 일흔이 훌쩍 넘었다. 한국전쟁에 무사했더라도 다시 뵐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손 회장은 “이제 고향에는 나를 기억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 그래도 고향에 갈 수 있으면 부모님 묘 찾고 싶어. 당시도 고령이시라 가묘 자리도 잡아 둬서 바로 찾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
멀리서나마 고향을 보기 위해 손 회장은 매년 황해도 연백군이 보이는 강화도 망배단을 찾아 망향제를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