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명절에도 갈수 없는 북녘 내 고향
상태바
추석명절에도 갈수 없는 북녘 내 고향
  • 서용덕 기자
  • 승인 2015.09.25 10: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52년 황해도 연백에서 강제징집 고향 떠나와
스물여섯 꽃다운 청년을 흰머리 노인으로 바꿔놔
▲ 황해도 충남지구도민회 손천일 회장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눈앞에 다가왔다. 추석 가족과 친지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생각에 설레는 시기다.
흥겹고 기쁜 추석에도 만날 수 없는 가족 생각에 비통해하는 이들이 있다. 분단으로 가족 친지들과 생이별한 실향민이다.

살 같은 세월은 스물여섯 꽃다운 청년을 흰 머리 덮어쓴 노인으로 바꿔 놨다.
“1남 3녀 중 막내였는데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환갑을 맞으셨으니 지금으로 쳐도 굉장한 늦둥이였지. 어릴적 어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사탕 사달라고 떼를 쓴 것이 생생한데…”
황해도충남지구도민회 손천일(86·홍성읍) 회장의 머릿속에는 고향인 연백군의 풍경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곡창지대인 연백평야 너른 들은 쌀과 잡곡 생산량이 많고 질도 좋았다.

손 회장은 “연백군은 38선으로 남북이 나뉘었지만 초기만 하더라도 왕래가 자유로워 당시에는 이렇게 단절돼 갈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손 회장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고향인 황해도 연백군에서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돼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됐다. 이후 인민군을 탈영해 국군에 투항한 손 회장은 1953년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 때 논산수용소에서 풀려났다. 당시 UN군과 사전 동의가 없었던 반공포로 석방이라 미군이 석방을 막아 탈주에 가깝게 수용소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논산에서 결혼한 손 회장은 1969년 홍성으로 이주해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며 무탈하게 6남매를 키웠다.

손 회장은 “명절을 앞둬서인지 가요무대에 고향생각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나도 모르게 고향이 떠올라 끝까지 보게됐다”며 “젊어서는 먹고살기 바빠서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런 때는 고향과 부모님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고 말했다.
분단 이후 손 회장은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 했지만 1983년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10살 위 누님과 감격의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손 회장은 “누님은 외국인과 결혼해 미국에 거주하고 계셨죠. 방송을 통해 소식을 알게 돼 만날 수 있었는데 부모님을 고향에 두고 혼자 살겠다고 왔다는 것이 죄송스러워 용서를 구했습니다”고 말했다. 
분단 이후 먹고 살기 바빠 고향과 부모 생각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손 회장에게는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손 회장이 고향 연백을 떠났을 당시 아버님의 연세는 일흔이 훌쩍 넘었다. 한국전쟁에 무사했더라도 다시 뵐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손 회장은 “이제 고향에는 나를 기억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 그래도 고향에 갈 수 있으면 부모님 묘 찾고 싶어. 당시도 고령이시라 가묘 자리도 잡아 둬서 바로 찾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
멀리서나마 고향을 보기 위해 손 회장은 매년 황해도 연백군이 보이는 강화도 망배단을 찾아 망향제를 올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