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20>
장현배 전 서울시향 부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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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20>
장현배 전 서울시향 부수석
  • 장윤수·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1.26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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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배 전 서울시향 부수석


농부의 아들로 음악의 꿈 꾸며 트롬본 연주자의 길로
음악대학 진학 후 교편을 잡고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부수석 ‘전성기’ 이후 최근 ‘우리동네 예술학교’ 강사
“음악은 내 전부”… 끈기와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어

농부의 아들로 음악의 꿈 꾸며 트롬본 연주자의 길로음악대학 진학 후 교편을 잡고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부수석 ‘전성기’ 이후 최근 ‘우리동네 예술학교’ 강사“음악은 내 전부”… 끈기와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어

 

“구항으로 넘어가는 하고개 바로 밑이 제 고향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성장기를 그곳에서 보냈죠. 처음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음악을 하면 건방져진다거나, 폐가 나빠진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럼에도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 찬송가도 부르고 하모니카도 불며 음악에 대한 관심과 꿈을 키웠습니다.”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수석 장현배 씨의 말이다. 장 씨는 홍성고등학교 재학 당시 밴드부 활동을 했다. 당시 음악선생님은 키가 크고 팔이 길다는 이유로 장 씨에게 트롬본을 불게 했다.

“홍성에서 음악 공부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들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가르치지, 정통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보니 입술 모양이나 호흡, 손의 움직임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음악 공부에 집중을 하던 장 씨는 클라리넷을 불던 친구를 통해 서울에 있는 강사를 소개받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로 올라가 개인 레슨을 받았고 대학 입시가 임박할 때에는 두 번씩 오가며 지도를 받았다. 장 씨는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게 됐는데, 그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서울이나 대전에서 배운 학생들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만큼 저는 실력이 부족했습니다. 도시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시작했지만 저는 상대적으로 늦은 이유도 있었죠. 그럼에도 운이 좋았던 것은 당시 지원자가 많지 않았고, 실수를 덜 한 덕분에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장 씨는 한양대에 입학한 이후 한눈을 팔지 않고 연습에만 매진했다. 열심히 연습하는 선배들을 본받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연습을 하다 보니 2학년을 마칠 때 쯤 다른 학생들과 어깨를 견줄만한 수준이 됐다. 장 씨의 대학시절엔 여러 음악대학 사이에서 ‘어느 학교 아무개가 연주를 잘 한다더라’하는 소문이 돌곤 했는데, 장 씨도 그 반열에 오를 정도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대학에 다니던 장 씨는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게 됐다. 장 씨는 거의 매주 국가 행사에  참여하고 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해군에 지원했지만 낙방하게 됐고 육군 공수 특전사령부에 배치를 받게 됐다.
“생각지도 않은 부대에 배치돼 훈련을 받는 과정이 상당히 힘들었죠. 사단군악대 활동을 했는데, 전공을 한 사람도 거의 없어 연습을 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제일 어렵다는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하고 나니 끈기나 굳건한 의지 같은 것들이 생겨 인생에 있어 소중했던 시간으로 추억하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4학년에 복학한 장 씨는 두 곳의 오케스트라에서 오디션을 봤지만 낙방하게 돼 잠시 동안 교편을 잡게 됐다. 그렇게 6개월 정도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던 장 씨는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트롬본 연주자 자리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연습을 시작했다. 한 달 간 연습에만 매진한 장 씨는 결국 합격해 서울시립교향악단에 입단하게 됐다.

“학생 때는 교향곡이나 서곡 하나를 거의 6개월에서 1년간 연습을 합니다. 그런데 직업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니 교향곡 같은 것을 짧게는 이틀 정도밖에 하지 않더라고요. 해외에서 공연을 하는 등 중요한 때에는 일주일 정도 연습을 하고요. 그렇게 짧은 기간 연습을 해 연주를 하다 보니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연습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꾸준히 노력했죠.”

그렇게 연주 활동을 하던 장 씨는 1994년 서울시향에서 지원하는 해외 연수제도를 통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금관악기의 본고장인 러시아에서 장 씨는 기초적인 부분부터 재정비를 받았다.
“원래는 2년 정도 연수를 희망했는데, 연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년밖에 갈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다 호흡이나 입술 모양에서 잘못된 부분들이 있었고 그것들을 고치면서 다시 한 번 실력을 늘릴 수 있었던 기회가 됐습니다.”

러시아 연수를 다녀온 뒤 실력이 향상된 장 씨는 시험을 보고 부수석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홍성 출신의 장 씨가 서울시향 부수석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도시에서는 수 십 년의 역사를 지닌 학교에서 국립교향악단이나 시립교향악단, 교편을 잡고 있는 선배들이 후배들을 가르쳐주는 문화가 형성돼 있어 그 수준이 훨씬 높죠. 그렇지만 홍성에서는 그런 기회가 거의 없어 홀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수석이 악기를 연주할 수 없거나 부재중일 때 그 자리를 대신해야하는 부수석으로서 장 씨의 어깨는 엄청난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트롬본 솔로 중 가장 어려운 곡은 라벨의 ‘볼레로’라는 곡인데, 이 곡을 연주할 때가 가장 어려웠다고 장 씨는 회고한다.
“선율이 흐르다가 제가 연주를 해야 하는 부분이 되면 심장 박동이 마치 달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빨라집니다. 그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죠. 다행히 실수 없이 연주를 잘 마쳐서 안도할 수 있었죠.”
이밖에도 장 씨는 지난해 작고한 뉴욕 필하모닉 지도자이자 세계 최고의 지휘자로 불리는 ‘로린 마젤’과의 협연을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았다. 연주 실력이 향상된 것은 물론, 세계 최고의 지휘자와 연주를 했다는 자부심이 크게 와 닿았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서울시향을 퇴단한 장 씨는 최근에는 ‘우리동네 예술학교’라는 복지 프로그램의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우리동네 예술학교는 저소득층이나 다문화 가정과 같이 어려운 생활환경에 놓인 아이들을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악기와 강사를 지원해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초기에는 오케스트라만 있었으나 최근에는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우리동네 예술학교는 일주일에 두 번, 두 세 시간씩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울시향 출신 강사들을 비롯해 채용된 강사들을 통해 서울시내 6개 구에서 진행하고 있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클라리넷, 트럼펫, 트롬본 등 관현악 분야 담당 선생님들이 적게는 4명, 많게는 6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3년에서 4년가량 참여한 학생들은 실력이 상당합니다. 특히나 음악은 짧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된 학생들이 연주를 잘 하는 편이에요.”
이밖에도 장 씨는 최근 홍성고등학교 동기들과 모여 색소폰 연주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다. 트롬본을 연주하던 장 씨는 바리톤색소폰을 맡고 있다.

“클라리넷을 전공한 동기와 제가 주축이 돼서 아주 재밌고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나가고 있죠. 친구들끼리 이런 활동을 한다는 걸 주변에서 부러워하기도 하죠. 7~8명의 동기들이 주말마다 연습실을 빌려 함께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음악과 함께 해 온 장 씨는 음악을 자신의 ‘전부’라고 말한다. 장 씨의 딸도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그의 길을 이어나가고 있다.

“예원예고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한 딸은 비엔나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텍사스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딸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저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어렵게 음악의 길을 걸어야했지만, 훨씬 좋은 환경에서 음악 공부를 해 나가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장 씨는 “사람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느낄 때 더욱 열심히 하게 된다”면서 “항상 부족한 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장 씨는 음악의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에게 조언과 당부의 말을 덧붙였다. “우리 때와는 달리 홍성에서도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또 최근에는 인터넷이 발달해서 훌륭한 연주자들의 자세와 연주를 얼마든지 접할 수 있죠. 이런 환경 속에서 본인이 끈기 있게 노력을 한다면 실력이 향상되고 꿈을 이뤄갈 수 있을 겁니다.” <끝>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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