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지형을 품은 효심 가득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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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지형을 품은 효심 가득한 마을
  • 서용덕 기자
  • 승인 2016.01.2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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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신문- 홍북면 용산리 용갈산마을
▲ 마을전경.

□ 용갈산마을역사
원래 홍주 치사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두리와 갈산리 일부를 병합해 오늘의 용산리가 됐다. 그뒤 용갈산마을과 용두마을로 편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갈산마을은 삽교천의 지류인 금마천을 앞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 지대에 마을이 형성돼 있다. 이 일대에서는 선사시대 유적지가 조사되는 등 예로부터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금마천이 가까이 위치해 물이 항상 풍부해 여름철 홍수 피해가 종종 있었지만 가뭄 피해는 없다시피 해 농사가 잘 되어 부자동네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과거 삽교천 제방을 쌓기 전에는 금마천에도 물이 많이 흘러 마을에 나루터가 자리했다. 노를 젓는 방식이 아닌 금마천 양쪽편에 줄을 묶어두고 뱃사공이 줄을 당겨 왕래하는 식이라고 한다. 100여년 전만해도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기위해 이곳을 찾아 주막집도 생기는 등 번성했으나 현재는 배터거리라는 지명만 있을 뿐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당시 용갈산 주민들은 이른바 깨어있는 사람들이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홍성읍내로 가서 만세운동에 참했다 일제에 고초를 겪은 주민이 있는가 하면, 읍내까지 못갔던 사람들은 말무덤재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는 등 독립을 향한 열망을 표출하기도 했다. 마을 뒤편으로는 낮은 야산 지대에 마을이 형성돼 있는데 그 산세가 용과 같다고 해서 용산리라고 불린다. 지역의 지명은 용을 닮은 지형에서 나온 것이 많다.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자리에는 미륵이 있는 자리쯤으로 용두리라 불린다. 용머리로 가는 길목이 용의 불이 난 자리이며, 그 몸통이 용두마을과 용갈산마을로 이어오고 용갈산에서 꼬리를 드리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갈산은 용갈미로도 불렸다고 한다. 과거에는 보를 막고 농사를 짓다보니 폭포처럼 물이 흐르고 고기가 뛰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물과 용이 어우러지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마을회관.

□ 효자 정용해 정려 등 마을전설
마을 뒷산에는 오래된 미륵이 하나 있다. 최병우 노인회장은 “정확한 내력이 전해오지 않아 얼마나 오래된 미륵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년 칠월칠석에 마륵제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미륵은 허리가 부러져 이은 흔적이 남아있는데 1900년대초 번개에 맞아 허리가 부러진 것을 주민들이 회로 붙였다고 한다. 부러진 미륵을 붙인 것에는 이야기가 특별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미륵의 몸통이 부러졌지만 무게 때문에 아무도 복원할 생각을 못 했는데 어느날 마을의 한 노인의 꿈에 백마가 나타나 미륵의 몸을 다시 이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졌다. 꿈 이야기가 알려지자 동네주민들이 힘을 모아 미륵을 복원했다. 1989년 여름에는 미륵을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아산에서 발견해 다시 되찾기도 했다. 작은말 길가에는 효자정용해의 정려가 있다. 정용해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깊어 병환으로 아버지가 몸져눕자 한 겨울에 잉어를 잡아 드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해 효자로 불렸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과거에 급제하기도 했는데 역적으로 몰려 고초를 겪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였다. 정용해는 어머니의 3년 상을 치르고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지자 효자명정을 받게돼 1983년 용산리에 정려가 세워졌다.
 

□ 미륵제, 두레 등 마을전통
음력으로 칠월칠석이면 용갈산마을 주민들은 미륵제를 지냈다. 지금은 마을 공동재산을 활용해 부녀회에서 제수를 장만하지만 예전에는 용갈산 주민만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주민들이 각자 쌀과 돈을 조금씩 나눠 제물을 마련했다. 미륵제는 오전부터 시작해 정오 무렵에 끝나는데 조민 모두가 모여 풍장을 치며 하루종일 즐거운 축제의 시간을 보냈다. 40여년 전에는 기독교 신자가 늘면서 미륵제가 잠시 끊기기도 했는데 우연인지 마을에 자꾸 사고를 겪는 사람들이 발생해 다시 미륵제를 지내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칠석날 열리는 미륵제는 ‘두레먹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레는 6.25 이전에 사라졌고 당시의 이야기만 전해진다. 당시 용갈산 두레는 강성했다고 한다. 두레는 어려운 세대부터 찾아가 모를 심고 논을 매주고는 했다.
 

▲ 용갈산마을 주민들.

□ 마을회관 어르신들의 이야기
폭설이 그친 지난 25일 용갈산마을회관에는 할아버지방, 할머니방에 각기 모여 저마다 이야기 꽃을 피웠다. 폭설에 수도관이며 보일러 배관 등이 얼어붙어 고생했다는 생활의 이야기부터 동네 청년들의 자랑 등 저마다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효자가 난 마을이라 그런지 지금도 용갈산마을의 청년들은 마을의 어르신들을 극진히 모신다는 마을어르신들의 칭찬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회관에 모여 늘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데 마을 부녀회 등은 매일 점심시간 마을회관을 찾아 어르신들이 따뜻한 밥을 드실 수 있게 식사를 준비한다고 한다. 또 청년들은 겨울철 눈이 내리면 어르신들이 눈길이 미끄러져 다치지 않게 회관가는 길과 마을 안길 등에 쌓인 눈을 아침부터 나서서 치우는 등 어르신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어 자식들보다도 낫다며 칭찬이다.
 

□ 견우직녀 설과 결합 마을축제 구상
홍성은 이장은 이장직을 맡은지 6개월여 밖에 되지 않은 신임 이장이다. 홍 이장은 매년 칠월칠석날 마을에서 개최하는 미륵제와 견우와 직녀설화를 결합해 작은 마을축제를 개최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홍 이장은 “우리마을에도 미륵이 있고 인근 어경마을에도 미륵이 있는데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말에는 우리마을 미륵은 할아버지 미륵이고 어경마을 미륵은 할머니미륵이라고 한다”며 “아직 어경마을과 협의가 된 것은 아니지만 칠월칠석이면 견우와 직녀 만나는 날이니까 할아버지 미륵과 할머니 미륵이 만나는 날을 주제로 해서 작은 마을축제를 개최하면 어떨까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 이장은 “매년 미륵제를 여는데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해 출향인도 초청하고 외부 사람들도 찾을 수 있게 축제화하면 우리마을은 물론이고 인근지역까지 활성화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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