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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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17>
  • 한지윤
  • 승인 2016.07.07 11: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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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그래, 젊음은 아름다운거야

날을 잡아 소영이는 병원에 면회를 하러 갔다. 사회의 희생자가 되어 쓰러진 이 가련한 영웅에 대한 선물은 한 통의 치즈와 세가지 빛깔의 오랑캐꽃을 담은 자그마한 꽃광주리였다. 국립요양소의 호텔같은 현대적 건물은 바닷바람과 햇볕을 받아 싱그럽고 조용했다.
여윈 얼굴에 수염을 기른 일호의 얼굴을 보자 소영이의 가슴은 갈기길기 찢겨 지는 것 같았다. 일호는 수술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서 바다를 볼 수 없었다. 병원 뜰은 소나무 숲을 사이에 두고 바닷가로 곧장 이어져 있어, 귀를 기울이면 밀려오는 파도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일호는 찢겨진 창문을 통해 달빛이 스며 들어오던 시골마을의 그 날 밤처럼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깍지끼운 채 천정만 바라 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손을 잡으면 설마 자는 시늉은 할 수 없겠지. 소영이는 결심을 하고 그의 손을 꼬옥 쥐어 줌으로써, 그를 당혹하게 해 주고 싶은 심정에 사로 잡혔으나 꾹 눌러 참았다.
소영이는 그날 밤의 괴로운 회한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열은?”
“별로……”
“식욕은?”
“종일 누워만 지내니까 별로다. 날이 갈수록 나아질 거라고 의사는 말하더군.”
“갈빗대 몇 개 잘라 냈어?”
“세 대……”
“보았어? 자신의 뼈를……”
“아니……보여주나? ”
“간수해 두면 참 좋을 텐데……”
“뭘 하게? 나이픈가 뭔가 만들 거야?”
“으응……두고두고 보고 싶으니까. 성경에 쓰여 있잖아. 그 뼈로 여잘 만들어 냈다구 말이야.”
유일호는 아무 말없이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다. 그 침묵의 의미를 소영이는 혼자 속으로 온갖 공상을 떠올리며 측정을 해 보았다. 이럴 때 자신의 여자성을 상대에게 의식케 해 주는 데는 역시 침묵으로 상대방을 바라 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너, 요즘 머리가 아주 짧아졌구나.”
유일호는 잠시 후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짧은 편이 활동적이고 다루기가 편한걸.”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고교시절 모양으로 길게 하는 쪽이 역시 매력있어 보이는 것 같아.”
“응, 그렇게 생각해? 그럼 길게 가꾸어 볼까?”
“좋아!”
유일호는 소영이의 주저없는 제의에 반신반의하며 동의를 했다.
얼마 후 소영이가 다시 요양소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머리는 얼마간 길러져 있었고 비록 어깨에 늘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다.
“정말로 기를 생각이야?”하고 유일호는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 네가 그 편이 좋다고 말했으면서……”
소영이가 남자의 <리퀘스트>에 의해 머리를 기를 까닭이 도저히 없다면서 연숙이가 의아해 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었다.
 
유일호는 어느새 소영이의 머리카락이 얼마만큼 길어졌는가를 보는 것을 하나의 낙으로 삼게 되었다. 요양소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 있는 커다란 즐거움의 하나가 소영이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연인 이상의, 일종의 자기 아내로써 제 나름대로의 기대와도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유일호가 띄어 보내는 편지에서 분명하게 소영이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호소해 온 일도 있었던 것이다.
“너, 어쩔 참이야? 고양이에게 쥐포를 보여 주면서 ‘어서 온, 어서 온’ 하고선 뒤로 꽁무니를 빼고는 ‘요새끼’ 하며 내동댕이 치는 짓을 할 생각이니?”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난 말이다, 유일호 녀석한테서 여자로서 모욕을 당한 듯한 기분이 떠나질 않는 걸. 그러니까 보복을 해 주는 거란 말이야.”
“얘, 그만 둬라. 다시 말하지만 금만 둬. 그런 잔인한 짓은, 넌 자신이 여자로서 어지간히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긍지와 자부심의 콧대가 대단한 것 같은데……하긴 너 정도의 여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다 진짜 괜히 좋아질라.”
연숙이는 일장 설교를 했다.
“염려 마, 염려 푹 놓으시라구. 프로포즈에는 절대로 응하지 않을 테니까……”
“난 널 친구로 좋아하고 있지만, 얘, 잔인한 여자는 싫다. 네가 유일호를 그렇게 잔혹하게 노리개감으로 여긴다면, 난 말아야……”
그러나 연숙이와 그런 얘기를 주고 받고 난 뒤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소영이는 간신히 일어나 걷게 된 유일호와 해안의 소나무 숲 속에서 데이트를 했다. 소영이는 병문안을 끝내고 돌아서 나오는 길이었고, 유일호는 소영이를 바래다 주러 나왔던 길에서였다.
달디 단 밤이었다. 소나무 숲 위의 울창한 가지에 어슴프레한 반달이 걸려 있었다.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으며 두 사람이 밟고 걸어가는 발 아래에는 모래가 사각사각 신비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일호가 키스를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의 건강 상태는 아직도 상당히 나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겠다고, 소영이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슬쩍 그의 표정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의 팔이 소영이의 어깨를 붙들었고, 유일호의 몸이 앞으로 구부러지며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 위로 사납게 눌러 오는 것을 소영이는 피할 사이도 없었다.
<계속>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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