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라는 이름의 로봇청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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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라는 이름의 로봇청소기
  • 윤여문<청운대 교수·칼럼위원>
  • 승인 2016.08.0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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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상상해 보라. 일주일 내내 과중한 업무와 잦은 술자리에 시달리다가 모처럼 맞이하는 한적한 주말, 아주 편한 옷차림으로 거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거나 TV 바둑 채널을 본다.

요즘처럼 햇살이 좋은 오후, 다소 덥지 않나 싶으면 열어놓은 창문으로 시원한 산들 바람이 스며들어 머리카락을 기분 좋게 건드린다. 출출한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내는 주방에서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필살기인 맛있는 잔치국수를 만들고 있고,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각자의 방에서 얌전히 독서를 하고 있다. 문득, 문자 알림 소리에 휴대폰을 열어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천만 원이 입금되어 있고,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지난 정밀 검사에서 모든 병이 감쪽같이 완치되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정말 환상적인 주말 오후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러한 주말을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겪을 일이 없을 것이란 불길한 생각마저 든다.

“제발 그렇게 있지 말고 청소 좀 하시지?” 소파에 두어 시간 정도 누워있으면 반드시 듣게 되는 아내의 잔소리다. 만약 그 전날 밤에 일 때문이 아닌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을 진탕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왔다면 좀 더 서슬퍼런 표현이 되기도 한다. 이런 현실에서, 그러니까 다음날 숙취에 해롱거리며 소파에 누워 아내가 콧노래를 부르며 맛있는 잔치국수를 내어 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글렀을 뿐만 아니라, “출출하니 잔치국수나 먹을까?”하고 부탁하는 것은 ‘잔치국수’는커녕 그 수십 배 되는 엄청난 양의 바가지를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결혼생활 15년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술 마신 다음날 오전, 아내가 먼저 잔소리하기 전에 거실 청소를 미리 해놓거나 아니면 둘째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에서 몇 시간이고 놀아주어 잔소리를 모면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좋다라는 결론이다. 엄청난 숙취에 요동치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거실 청소를 하거나, 헛구역질을 ‘꺽꺽’대면서 작렬하는 태양 밑에서 아이와 뛰어 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당신 생일 선물로 로봇청소기 사줄까?” 지난달에 아내의 생일이 근접하여 슬쩍 물어봤다. 사실,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다는 것이 나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물건을 살 때 심각한 결정 장애를 겪고 있는 이유는 너무 과한 선물은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고, 너무 소소한 선물은 받는 사람이 실망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일 년에 몇 번 다녀오는 출장에서 제일 힘든 것은 출장 자체의 일이 아닌 돌아올 때 준비해야 하는 선물 선택이다. “내 생일 선물로 로봇청소기? 이거 왜 이래? 선수들끼리.” 아내는 단칼에 거절했다. 나의 얕은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이다. 아내 생일 선물로 로봇청소기를 구매한다면 나는 ‘생일 선물’과 ‘거실 청소’라는 두 개의 귀찮은 일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역시 아내는 내 머리 위에 앉아있다. 결국 아내에게는 현금을 주었고, 나는 스스로를 위해 로봇청소기를 구매했다.

“로봇청소기 이름은 ‘여보’라고 할 거야. 다른 이름은 절대 안 돼!” 주문한 로봇청소기가 도착하여 가족 모두 거실에 동그랗게 모여 박스를 열면서 내가 한 말이었다. 워낙 강력하고 결연하게 주장하자 식구들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검은색과 빨간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룬 놈이다. 납작하게 생겨 요리조리 집안 구석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재밌다.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피하기도 하고 한참을 부지런히 청소하다가 충전이 필요하면 알아서 충전기로 돌아가기까지 하니 대견할 따름이다. 침대나 소파 밑에 들어가 묵은 먼지를 청소하고 나올 때는 마치 내가 한 것 같아 측은하기까지 하지만 이 신통방통한 작은 기계 덕택에 나는 이제 소파에 오랫동안 누워있을 수 있다. 아내가 “여보, 청소 부탁해요”하면, 나는 “알았어, 걱정마”하곤 바로 로봇청소기의 시작 버튼을 누르면 되는 것이다. 로봇청소기 구매 이후로 아내와 청소 문제로 갈등을 겪어 본 일이 없으니 로봇청소기는 우리 가족의 평화를 굳건히 지키는 작은 수호신임에 틀림없다.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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