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통한의 흑룡강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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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통한의 흑룡강①
  • 김주호 <연해주지역독립운동 사적지답사단 해설담당>
  • 승인 2016.08.19 17: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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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8일부터 8월 12일까지 러시아 연해주 지역(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마치고 돌아왔다. 4박5일 일정의 짧은 여정이어서 새벽부터 초저녁까지 강행군의 연속이었으나 누구 하나 낙오되거나 불평 없이 진지한 탐방이 계속됐다. 이번 탐방은 충남서부보훈지청(지청장 안기선)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한국스카우트 홍성지구 주관으로 알찬 결실을 맺고 무사히 귀국했다.

홍성군내 중고생 30명과 지도자 8명으로 답사단(단장 이순규 보훈과장)을 구성하고 장장 1만3000리를 돌아왔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해 곧 바로 1시간을 달려 라즈돌노예역에 도착했다. 이 역은 1937년 스탈린의 지령으로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17만여명(실제로는 35만명으로 추정)을 집결시켜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 6000km를 달려 중앙아시아(시베리아)로 강제 이주시킨 출발역이다. 이 과정에서 13만여명(실제로 25만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고 도착하자마자 지식인 3000여명이 총살당했으니 세상에 이렇게 분통 터지는 일이 또 있겠는가! 더욱이 가슴 아픈 일은 1860년대 이래 한 두 가구씩 남부여대 연해주로 이주해 터전을 가꾸었고 1910년 국권침탈후에는 함경도 주민들이 대거 이주(일제의 수탈도 피할 겸 때마침 러시아 정부에서 이주를 권장)해 황무지나 다름없던 연해주 지역을 억척스럽고 강인한 함경도 기질을 발휘해 옥토로 만들고 이제 좀 살만하다 싶을때 영문도 모른채 생지옥으로 끌려갔으니 이 얼마나 절통할 일인가! 우리 동포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한인촌 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올릴때 울컥 눈물이 쏟아지고 분노가 치밀었다.

이 기분은 최재형 선생 거주 가옥에 도착했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낯선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이자 거부로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초대 재무총장(지금의 재정경제부장관 격)에 임명될 정도로 저명한 애국자였는데 다음해 4월 참변 때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하셨다.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는 윤봉길 의사 뒤에 김구 선생이 있었듯이 안중근 의사 뒤에 최재형 선생이 있었다는 사실이다(실제로 안중근 의사 순국후 그 가족의 생계를 적극 지원했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하기 전 1909년 3월에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만세삼창을 한 일을 기념하는 ‘단지동맹기념비’가 있다. 이 기념비 앞에는 무게 200kg 정도 되는 정육면체형의 돌 15개가 3줄로 나란히 놓여 있는데 이것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한 후 관동법정에서 이토와 일본의 죄상 15개 조목을 열거하며 사자후를 토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어서 더욱 뜻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수이푼 강변에 위치한 이상설 선생 유허비 앞에서는 무거운 중압감이 짓눌러 오면서 뭔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였다. 유허비 사방의 소나무 가지에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태극기가 수십 개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종황제에게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도로 망명해 1906년 용정에 서전서숙(중·고교)을 설립한 뒤 다음해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됐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이준 열사가 분사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여러 나라 대표들을 만나 구국외교에 헌신했다. 1908년 연해주로 망명(이 사이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이상설은 한성법원 궐석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음)해 13도 의군을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로 활동하다 1917년 타계하셨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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