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통한의 흑룡강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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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통한의 흑룡강②
  • 김주호 <연해주지역독립운동 사적지답사단 해설담당>
  • 승인 2016.08.25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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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선생은 모든 유품을 불사르고 시신은 화장해 수이푼 강에 뿌릴 것을 유언했으나 천만다행으로 소각을 면한 ‘산술신서’ 등이 발견됨으로써 선생이 근대 수학 과학의 창시자임이 입증됐다. 구학문과 신학문을 고루 섭렵한 선생은 법학에도 능통해 가히 천재라 아니할 수 없으며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학자의 길에서 크게 공헌할 인물이었을 것이니 충청인(진천)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했던 발해 성터에서 옛날을 회상해 보기도 하고 연해주 거주 한인 학생들을 위해 교과서를 발간했던 ‘보문사’, ‘시립공동묘지’,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와 한인들이 총살당했던 ‘4월 참변 추모비’, ‘향토박물관’, ‘한인 이주 150주년 기념비’ 등을 답사했다. 그 옛날의 참변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흐르는 흑룡강(러시아명 아무르강)을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조선 숙종 때 청나라와 맺은 국경조약의 내용이 새겨진 백두산 정계비에 의하면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이 양국의 경계선으로 새겨져 있었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3개의 강(압록강, 토문강, 두만강) 중에서 토문강은 송화강의 상류로 이 송화강이 흑룡강(아무르강)에 합쳐지니 확대 해석을 하면 백두산에서 하르빈 이동의 땅 러시아 연해주 지역(하바로프스크 이남 지역)까지 한국 땅이 되는 셈이다(연해주 지역은 1860년까지 중국 영토였음). 그런데 1909년 청과 국경분쟁이 다시 불거지자 우리 정부대신 일본이 나서서(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됨) 청·일간에 ‘간도협약’을 맺을 때 일본이 토문강은 두만강을 말하는 것이라 강변(청나라에 이롭게)하고 그 대가로 일본은 청으로부터 남만주철도 부설권, 삼림벌채권, 광산채굴권 등을 거머쥐었다.

교활한 일본이 남의 땅을 가지고 인심(?)을 썼으니 국제 사기꾼인 셈이다 토문(土文)은 중국어, 만주어, 한국어 어느 언어로 번역을 해도 ‘두만’이라는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그 당시 대한제국은 아무런 힘이 없었고 ‘간도협약’이 맺어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그저 원통하고 절통할 뿐이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백두산 정계비가 사라졌으나(일본의 소행) 엄연한 역사적 사실과 기록은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한강의 상류는 동강, 달천강, 소양강, 홍천강 등 여러 명칭이 있으나 이 강들은 모두 한강 본류로 흡수되고 있으니 한강이나 마찬가지다.

충남을 관통하는 금강도 공주에서는 공주강, 부여에서는 백마강이라 부르는데 그게 금강이지 낙동강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토문강이 송화강이고 송화강이 흑룡강(아무르강)이지 두만강이 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흑룡강(黑河)은 1921년 흑하사변(자유시 참변 전사272명, 피포자917명, 행불포함 익사자 281명)이 일어난 중소 접경지역으로 청산리대첩 이후 모처럼 활활 타오르던 독립군활동에 일대 타격을 입힌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청산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 일대 조선족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 하며 독립군을 중, 소 국경지역으로 몰아붙였고 이에 우리 독립군 10개 부대 연합군이 흑룡강을 넘어 노령 자유시로 이동해 소련의 비호를 받으며 재충전을 하고 있던 차에 소련대표 카라한과 일본대표 요시자와가 캄차카 반도 어업 문제로 회담하던 중 일본대표가 귀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일-소간의 우의에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으니 소련에서 독립군을 몰아내라고 으름장을 놓자 당시 공산당 혁명으로 질서가 잡히지 않고 국력이 소진됐던 소련이 이에 굴복하고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명했다.

홍범도 부대는 무장을 해제하고 시베리아로 갔으나 대부분의 독립군 부대들은 소련의 무장해제에 강력히 항의하고 일전불사를 외치고 소련과 무력충돌을 일으켰으나 이란격석으로 참패를 당했으니 일본군 한 명도 죽이지 못하고 소련의 배신에 우리 독립군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니 아무런 보람도 없는 의미 없는 뼈아픈 전투였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활동이 위축되고 소강상태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이 ‘흑하사변’이었으니 말없이 흐르는 흑룡강(아무르강)을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고 원통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북한과 인접한 ‘포시엣’ 항구를 들러보았다. 북한산 양질의 석탄을 철도편으로 이곳에 운반하고 다시 배편으로 우리나라에 온다고 하니 그 물류비가 만만찮을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하는데 분단된 조국이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우리는 연해주지역을 돌아보며 호국 보훈 독립군 유적지를 비롯한 동포들의 애환, 고달픈 삶을 보고 들으며 많은 것을 체험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앞으로는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호국, 보훈, 독립군 유적지 등을 살펴보고 나라 사랑과 통일의지를 다짐하는 계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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