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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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31>
  • 한지윤
  • 승인 2016.10.25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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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그래, 젊음은 아름다운거야

소영이가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온 때는 저녁 7시 반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낮부터 딸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던 모양으로 몹시 언짢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어딜 갔다 오는 거니?”
“남자 친구들을 만나 별장에 가서 놀고 있었는데요.”
어머니는 실은 걱정이 되어 아버지와 동생을 밖에 찾으러 내보냈었다. 그런데 동생 규형이는 동생대로 어디론가 새 버렸고, 아버지는 엉뚱한 곳만 찾았는데, 할아버지는
“아아니, 소영이는 저녁 때가 되면 배가 고파서 돌아올건데 웬소동이냐, 소동은……”
하고 태연자약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애가 잔뜩 타서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어떤 별장인데?”
“살림 맡아주는 할멈이 귀찮아 어디론가 나가 버려, 남자들 둘이서 점심도 해 먹지 못하고 배가 고파……불쌍한 생각이 들어 먹을 걸 좀 요리해 주고, 덕분에 나도 잘 먹고 왔는걸요.”
“남자들만이 있는 별장에 가 놀다 왔단 말이지? 소영이, 넌 그게 잘한 일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니?”
“어머, 난 그렇게 해서 뜻밖에 좋은 남편감이라도 횡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소영이! 억지로 말을 만들지 말아라!”
할아버지가 예의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기침은 꽤 의미심장한 것으로, 이젠 그만 해 두려무나 하는 명령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날 저녁, 소영이의 일가는 가족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난 어느 일요일 오후, 소영이는 갑자기 피서지에서 만난 두 청년들이 생각났다. 한 번 더 만나 즐겨도 나쁘진 않겠지 하는 무료한 생각을 해 본 것이다. 가을 기운이 깔려 가는 9월 초순 속리산의 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 나무숲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을 받은 최고인의 머리카락이 윤기를 머금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던 모습을 느닷없이 소영이는 회상했던 것이다.
소영이는 두 사내 중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 볼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키스까지 한 최고인의 인상이 선명히 떠올라 그에게로 전화하리라 마음은 먹었다. 소영이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중심구 청화동 최고인 이라는 전화번호를 열심히 찾아냈다.
청화동에 최고인 이라는 이름은 세 사람이나 있었다. 소영이는 세 사람 중 누가 피서지에서 만난 최고인 일까 점쳐보다가 두 번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가정부 인 듯한 여자가 전화를 받더니 굵고 목이 쉰 듯한 소리로
“도련님, 또 여자분 한테서 전화예요.”
하고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를 닦고 있었는지, 화장실에 가 있었는지, 한 동안 기다린 끝에 귀에 익은 듯한 음성이 전선을 타고 묵직하게 울려 왔다.
“네, 최고인 입니다.”
“저는 소영이라고 하는데요.”
“네?”
상대편은 진정인지, 일부러 그렇게 해 보이는 것인지 짐작이 안 간다는 듯한 의사표시를 나타내 보였다.
“김소영 인데요?”
“실례하지만 어디에서 만난 누구신지요……?”
“속리산의 별장에서 만났던 소영이. 만나자 곧 키스한 여자. 아시겠어요?”
“아아!”
그 ‘아아’ 하는 말투는 약간 시큰둥 했다. 그 억양은 무례한 듯했고, 냉혹하고 오만하기까지 한 듯 했다.
“절 만나고 싶으신가요? 전 요즘 좀 바쁜데요……”
아직 소영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상대는 넘겨짚고 지레 질러 나왔다.
“한 번 더 만나서 데이트 했으면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은 지금 없어졌어요. 으스대는 남자는 싫으니까.”
“왕이 녀석을 대신 내 보낼까요? 괜찮으시다면…… 그녀석이라면 좋아서 만나러 나갈 건데요.”
소영이는 아무 대답도 않은 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눈앞에 최고인 녀석이 있다면 냅다 집어 던져 주고 싶은 심정이 솟구쳤다, 애당초 귤껍질에게 전화를 걸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고 소영이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여자로서 단호히 무시당하고 나자 귤껍질의 소박한 듯한 어리석음이 그리울 정도로 생각이 났다. 그러나 최고인에게서 ‘왕이 녀석을 내보낼까요’하는 소리를 듣고 난 지금 그녀로서는 왕이에게 전화를 걸 기분이 나지 않았다.
여름은 이제 거의 다 끝나갔다. 하늘은 가을빛으로 맑게 개어있다. 하늘빛이 아득히 맑게 번져 가면 중간시험이 시작되고 그것이 끝나면 온갖 행사들이 캠퍼스에 가을꽃처럼 만발한다.
소영이는 축제기간 중 생과자 따먹기 게임에서 일등을 했다.
그리고 소영이가 생과자를 목표로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 누군가에 의해 스냅 사진으로 찍혀 다른 사진들과 더불어 큼지막하게 확대되어 캠퍼스 게시판에 나붙었다.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 뒤 소영이에게 혼담이 들어왔다. 중매장이는 어머니의 동창생이라는 여자로서 여느 때는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축제 때의 소영이 사진을 보고 이런 아가씨라면 좋다고 저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소영이가 날씬한 폼으로 단거리를 달리고 있는 광경이 카메라에 스냅으로 찍혔나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영이는 한편으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계속>

<이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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