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 조마조마한 심정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생과자를 덥썩 물고 있는 가관의 장면인 줄을 알았더라면 어머니는 기겁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저 편 남자 쪽에선 얼마나 흉보게 될 것이냐고 안절부절 못해 할 것이 아닌가.
소영이는 그러나 그러한 모습의 자신이 마음에 들어 색시로 삼겠다는 청년에게 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소영이의 심정이 마치 외로움에 휘말려 있는 종류의 그런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돈 많은 집 자식인 최고인 에게서 냉혹하고 오만한 굴욕을 당한 그녀로서는 더더욱 그러한 감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영이는 이내 혼담을 포기해 버렸다.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는 그녀로서는 사진 한 장으로 느닷없이 인생이 급선회 해 버리는게 이상했고 그렇다면 혼담을 깔아 뭉개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소영이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감정이 되자. 마침내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통해 상대편에게 정중히 사양의 뜻을 전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영이는 외종 사촌 오빠로부터 회사의 테니스 코트장에서 테니스를 하자는 초청을 받았다. S철강회사의 서울 본사에 근무하고 있는 비록 소영이의 외사촌 오빠라고는 하지만 그와는 친 오빠 이상으로 허물없이 지내고 있었다.
S철강회사에서 이번에 본사 근처에다 사원용 기숙사를 짓고 테니스코트도 겸해 마련한 것이다. 코트를 개설한지 한달밖에 안 되었지만 새 코트인데다가 시설도 좋았으므로 일요일마다 사원들로 붐볐다.
소영이는 오전 11시에 오빠와 시청 역에서 만나 테니스 코트가 있는 테니스장으로 갔다. 코트에서는 이미 오빠와 같이 소속되어 있는 과의 남녀 동료들이 경기를 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오후는 그들과 복식게임을 함께 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4개의 테니스 코트장에서는 모두들 활기차게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소영이와 그녀의 오빠가 테니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왔을 때였다. 한창 경기를 하고 있던 그들이 모두 한 군데 모여 있지 않은가. 저 편 맨 끝 코트에서 열심히 뛰고 있던, 어지간히도 서툰 한 팀도 웬 일인가 하고 경기를 중단한 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 갔다.
“웬 일이야?”
소영이가 오빠에게 말했다.
“글쎄, 가 보자구.”
가까이 다가갔을 때, 소영이는 하마터면 ‘앗’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고 그녀는 그 순간 숨이 막힐 지경으로 놀라고 말았다. 사람들이 둘러서서 모여 있는 한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남자는 최고인 이었다. 속리산에서 보았던 때와 같이 지금도 그의 머리카락은 햇살을 받아 귀족적으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저는 비서과의 최고인 이라는 사람인데……”
그가 둘러선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실은 오늘 오후에 현 정당의 국회의원께서 이리로 테니스를 하시러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고시원 시절부터 그분과 교제를 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로서 이 곳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경기를 하시다가 곧 코트를 비워 주셨으면 합니다.
그분은 2시경 이 곳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두 코트면 충분하겠습니다.
“아니, 왜 두 코트나 비워 드려야 합니까?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요?”
“바로 이웃 코트에서 경기를 하다가 만일 옆의 사람과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위험한 일이죠.”
불평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분께서 경기를 하게 되면 여러분들도 자연히 라켓트를 놓고 구경하고 싶어질 테니……”
그는 자신에 가득 찬 말투였다.
“아니!”
오빠가 큰 소리로 말머리를 꺼내면서 그의 앞으로 비집고 나갔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그 사람을 이 테니스 코트로 불러 여러 사람들의 일요일 레크레이션을 방해하는 거요?”
“무슨 권한? 특별히……”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오빠 쪽을 돌아다 본 순간 소영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소영이가 짐짓 고시원 스타일로 인사를 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최고인도 인사를 했다.
“이 분은 제 사촌오빠인데, 금속과의 김주형씨 라고 하죠.”
소영이는 최고인 에게 오빠를 소개했다.
“국회의원께서 오는 거야 조금도 개의치 않지만, 그렇다면 더욱 일반인처럼 함께 경기를 해 주면 어떨까요?”
“아니, 특별히 그렇게 할 생각까진 없고……그러나 뭐라 하더라도 국회의원께서 오신다니까 코트를 양보해서 그 주변을 깨끗이 해 놓고 기다려도 좋지 않겠습니까?”
“국회의원의 입장이라면 어디서나 테니스가 가능하겠지요. 입회금이 비싼 클럽에 가입해 게임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나 무엇보다 이 테니스 코트는 이 S철강회사의 사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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