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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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7.01.2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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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가뭄으로 인해 충남 서부지역의 식수원이 되고있는 보령댐이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란다. 마실 물조차 걱정해야 될 다급한 상황에 때 맞춰 눈이 내렸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기분이 온통 우울하고 심란했는데 잘 되었다. 그래! 일단 가보는거다. 알베르 까뮈의 학창시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장 그르니에도 <섬>에서 차분하게 토로한 바 있지 않은가! 바쁜 일상에서 노여나 햇빛 찬란한 남유럽 어느 도시에서 담배를 피우며 빈둥거리는 여유! 그 소중함에 대해서 말이다. 집 가까이에 산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것도 가끔 TV화면으로 만나게 되는 히말라야의 산들이나 카프카즈(코카서스)산맥처럼 외외하고 살벌한 느낌마저 주는 산들과는 달리, 알맞은 시간동안 걷기에 딱 좋은 동산이 코앞에 있다는 것은 뭐랄까? 서가에서 무심코 뽑아든 책 속에서, 만원권 지폐를 발견했을 때처럼이나 기분이 환해지는 일이다.

산 초입에 우뚝 선 만해 선사의 모습이 여느때와는 달라보였다.

“어? 손이 유난히 크시네!” (오늘에서야 그걸 발견하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참!) 놀라움은 계속되었다. 전망대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의 층계들이 새것으로 말끔히 바뀌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산인데도 못 와본지가 꽤 되었나보다. 그것 참!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허리 굽혀 줍기만 하면 될 보물을 외면하며 살아왔는고! 전망대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전망대 발치에 마련돼있는 운동기구에 으레히 몇 명은 매달려 있기 마련이었는데... 나도 그들을 보며 은근슬쩍 끼어들어 운동을 하면서 흘깃흘깃 운동하는 사람들을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다들 약속이나 하듯 바빠졌나, 날씨가 다소 추워서인가? 다소 늦은 시각이라서인가? 전망대에 오르니 섬뜩한 냉기를 품은 대기 저 멀리 희끗희끗 눈을 품은 풍광이 어안렌즈로 담은 경치마냥 광대하게 펼쳐졌다.

일망무제! 탁 트인 전망 앞에서 코끝이 알싸할 정도의 날씨 속에서도 가슴은 알 수 없이 울적하였다. 까닭이 무엇인가? 어두워져 가는 날씨 탓인가? 원인은 다음 전망대까지 가는 내리막길 때문이었다. 2001년 1월이었다. 그 때는 눈이 자주 왔고 많이도 왔었다. 두 달 뒤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하고 4학년에 전학을 하게 될 어린 것들을 데리고 눈 위를 걷던 그 길을 혼자 걷게되니 공기는 상쾌해도 마음은 추억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다 그 겨울부터 애비와 함께 살게 된 어린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눈덮힌 산길을 걸었을까? 한 달에 두 번, 애비노릇 한답시고 처가에 가서 어린 것들을 볼라치면, 너댓살 밖에 안되는 작은 녀석은 밤에 잘 때도 애비가 도망치듯 가버릴까봐 손을 꼭 붙잡고 잠을 청했다. 새벽에 몰래 빠져나오기가 미안해서 가끔씩 낮에도 놀아주는 날에는 녀석 몰래 도망쳐나오기 위해 제 외사촌 형과 짜고 잔꾀를 써야만 했다. 동네 가게에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린 것은 눈치를 챘는지 못챘는지 가게 문턱을 넘어서기가 무섭게 “아빠! 피카추!” 한다. 나이로 볼 때 응당 대여섯 단어는 구사해야 될 나이에 단 두마디만 내뱉고 말다니! 아무튼 어린 것이 과자와 빵에 팔려있는 틈을 타서 나는 비호처럼 홍성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녀석이 지난 1월 10일 가장 추운 날에 자진 입대하였다. 어제는 훈련이 끝나면 자대 내 예하부대에 배속될 것이라고 문자가 왔다. 셸리의 싯구절처럼, 겨울이 깊으면 봄도 머지않을 것이다. 동편 전망대 열 두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 마음은 어느 봄날로 날아갔다.

4월 초파일  다음날이었던 것 같다. 계룡산 우적골 약수암으로 불공드리러 가시는 어머니와 함께 따라나선 것 같은데 갈 때의 기억은 없고 돌아올 때의 기억 뿐이다. 어린 나이에 40여리를 걷기란 여간 힘겨운게 아니었다. 업어달라고 하기엔 크고, 어리광부리기도 어중간한 나이에 나른한 봄기운으로 몸은 축축 쳐져서, 걷다가 서기를 반복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길섶의 잡초 속에 숨어있는 풀들을 가리키며 “이건 달래다. 이건 냉이고, 이게 꽃다지야!” 하고 가르쳐 주시고는 보자기에 뜯어 넣으셨다. 그 당시는 그 모든 것이 귀찮기만 하고 어서 집에 도착하여 쉬고싶은 생각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 어린시절은 행복했다.

이원기<청운대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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