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입은 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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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입은 봄에게
  • 한학수 칼럼위원
  • 승인 2017.02.1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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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예측을 불허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흔들리는 듯 방황을 하더니 좀 잠잠해지길 거듭 한다. 강가에 선 키 큰 미루나무를 좌우로 내동댕이치고 달아나는 바람의 성깔을 닮았다. 다수의 자기 계발서는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것’이라 말하고 더 이상 시치미를 뗀다. 기성세대가 젊은이에게 현실은 누추하니 너희가 꿈을 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비전을 제시하고 원기를 돋우며 밋밋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들이 지구촌의 기둥과 들보가 될 테니 말이다. 신구 조화로 한꺼번에 포효하는 함성이 국력이 아닐까.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올라가는 까닭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오르지 않고 산만 높다 하는 구나.’라고 노력의 중요성을 옛시조는 설파하지 않았던가. 마음은 얼마든지 우주를 품을 수 있으니 당장 가난하지 않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요원하다. 서로 기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군침이 괴는 삶의 레시피가 그립다. 자기가 은연중에 던지는 인색함이 타인에게는 고통이 된다.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데는 주관적인 시야가 우선이지만 공동체 사회의 덕목은 공생하는 시선에 더 가치를 둔다. 올려다보는 시선과 내려다보는 시선의 한 점이 더불어 사는 삶의 접점이 아닐까. 

랜디 포시는 “벽이 있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진정으로 원하는지 가르쳐 준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람은 그 앞에 멈춰 서라는 뜻으로 벽은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가능성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다. 벽을 눕히면 길이 된다. 어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읍내 이발소 액자에 “혼자는 외로워 둘이랍니다.”라고 쓰여 있던 글귀가 새롭다.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자. 평지보다 높이 솟아 있는 땅의 부분, 주변의 지면보다 복잡한 지형을 산이라 한다. 삶의 여러 굴곡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땀 흘리고 힘듦을 참으며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며 행복해 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다. 노희경의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라는 시를 기억한다. 

놓아주고 버리면 더 가치 있는 게 다가온다.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지만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찾아 다가서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산은 내가 천천히 걸어서 다가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늘 있다. 이겨라!, 정복하라! 하는 선전 문구는 대다수의 가치는 충족시키지 못한다. 서로의 관계에서 자유로우면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자기 내면의 눈이 가장 맑고 밝을 때 나도 보이고 다른 누군가가 보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일본인의 대인관계 문화를 보면 우리보다 선진국이라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스쳐 지나가다 신체 접촉이 본인 실수로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스미마셍”이라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 습관으로부터 나오는 언행이다. 한국인의 일상에도 필경은 그때가 오게 되리라.

‘인간의 생로병사는 한평생 허리와 다리의 싸움이다.’라는 격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강에 대한 명쾌한 담론이다. 건강은 나만 멀쩡하면 되는 게 아니다. 개인에게는 건강이 주어지면 삶에서 든든한 우군을 얻은 셈일 테지만, 공동체 사회의 건강한 삶은 좀 더 체계화 된 개념인 질서, 도덕, 정신 건강을 강조한다. 남을 나 자신처럼, 남의 잘못을 나의 잘못처럼 받아들이는 덕목이 필요하다. 사회질서의 기초이며 본질을 중시하는 삶의 발원이 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딕 티비츠가 ‘용서의 기술’에서 말한 “살아가기 위해서 용서하라”라는 말이 더 뜻 깊게 다가온다.

세상만사가 새옹지마라고 해도 든든한 ‘나 밖의 나’의 존재는 조직화된 사회에서 꼭 필요할 듯하다.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올려다보며 열심히 사는 것도 내가 사는 세상에 기여하는 방법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옆을 보고 평지를 살피는 삶도 가치 있는 인생이다. 연초록빛 새싹이 언 땅을 헤집고 기지개를 펴는 숨 막히는 봄날이 멀지 않다. ‘스프링벅’의 우화(寓話)가 인간세상에서 재현돼서야 되겠는가.

한학수<청운대 방송영상학과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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