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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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청춘들의 자화상 <53>
  • 한지윤
  • 승인 2017.03.2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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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기자 한지윤의 기획연재소설 - 그래, 젊음은 아름다운거야

소영은 목욕탕 표시의 간판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자는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유미가 들어간 뒤에 들어갈 것인가……?”
그 때였다. 뜻밖에도 방금 여관 안으로 들어갔던 유미가 불쑥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기만의 어떤 상념에 사로 잡혀 있었던지 소영과 연숙이가 서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신유미!”
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느닷없이 유미를 불렀다. 유미는 그러나 처음에는 의아한 눈으로 이 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씁쓸한 듯 미소를 지었다.
“유미야, 어젠 괜찮았어?”
소영이가 물었다.
“어제? 어제 뭘 말이지?”
“한 밤중에……”
유미는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 말했다.
“내가 곤드레만드레가 된 걸 보았었니?”
“우리 둘이서 널 집 현관까지 바래다 주었는 걸……”
“그랬어? 미안했구나.”
유미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나는 누구하고 마셨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 나는 걸, 정신이 들어보니 낮에 입고 있던 차림 그대로 침대 위에 있던 걸.”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술을 마시는 것 같았어.”
소영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주 이런 모텔에 오는 거니?”
“약혼자하고 오지.”
거짓말이야, 하고 소영은 내 뱉으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유미의 말에는 접근할 수 없는 청신함과 같은 것이 있었다.
“오늘은 그 사람한테 바람을 맞았는 걸,”
유미는 소영의 표정을 민감하게 받아 느끼면서 먼저 말했다.
“지금 약혼자라고 말했지만 내가 제멋대로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남자지. 그러니까 나하고 결혼하는 것이 싫다고 말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 이제 그는 슬슬 나에게 싫증을 느껴가는 모양이야.”
“얘기 더 해 줄 수 있어? 너와는 여태까지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지만 너를 혼자 있게 놔둔다는 것이 어쩐지 걱정이 되어서……”
소영의 말이었다.
“미안해. 그러나 염려는 놓으라구, 난 남자에게 거절을 당해도 걱정은 없어. 나 말이야. 이제 털어놓지만 지금까지 사귄 남자하고는 모두 여기에 왔는걸.”
세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우리 집 아빠는 일벌레여서 늘 집에 붙어 있지 않아. 엄마는 아빠의 후처인데 냉정한 냉혈 동물이야. 따뜻한 맛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인간. 그러니 내가 집에 들어가더라도 누구하나 반가워 해 주는 사람 없고 내가 늦게 들어가거나 말거나 걱정해 주는 사람도 없지, 엄마란 여자는 내게 다른 집 딸들 보다는 조금 넉넉하게 용돈이라도 주면 그걸로 의붓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줄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바람이 산들산들 유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곳에 나와 함께 온 남자들 대부분은 결과적으로 보면 나를 잔혹하게 다뤘지, 그러나 여기에 와 있는 동안만은 친철했고, 나는 즐거웠어. 용돈은 거의 여기서 써 버렸으니까……”
소영과 연숙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어젯밤 섹스에 대해서 그만큼 깊은 조애를 지니고 있던 연숙도 이런 상황 앞에서는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내가 지금까지 진정으로 사랑한 남자라면……”
유미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생각났던지 말하기를 주저주저했다. 그녀의 태도에는 무언가 위로하는 빛이 역력했다. 자신에 대해 자위하는 것일까.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들처럼 소영과 연숙에게 이러한 얘기를 들려주어도 좋을 것인가 하는 자기 위로였을까.
“누구지? 도대체 그 사람이……”
소영이가 쉰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군인이야.”
소영이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군인하고 헤어지던 날 밤, 소주를 두 병이나 비웠었지……”
“넌 확실히 여러 가지로 걱정이 많은 애구나, 그래.”
소영이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뾰족한 수가 없잖아? 마차가 폭주하기 시작한 셈이야.”
“제멋대로 달려가도 멈추게 하는 방법은 있지, 서부극이라면 그러한 마차 뒤를 말을 타고 쫓아가서 팔딱 뛰어올라 말을 진정시킴으로써 절망에 빠져 있는 여자를 무사히 구해 내지……”
“그렇지, 서부극에서는……”
유미는 그런 말 따위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아빠가 내 혼담을 진행시키려고 나올 것 같은 눈치가 보이는 거야. 맞선을 보고, 그리고 평범한 젊은이들 모양으로 몇 차례 영화구경을 하거나 식사를 하지, 그러고 나면 남자 쪽은 나를 아주 마음에 들게 생각할 걸. 얼마나 머저리일까……”
유미는 그런때만은 바람둥이 여자같은 말투를 썼다.
“상대는 사업상 아빠하고 친하게 된, 서울에서 유명한 집안이야. 남자는 키가 크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래. 학교도 일류대학을 나왔고 어디 나무랄 데가 없는 청년이니까 나 같은 여자를 얻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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