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읍청사, 군청앞시대 영욕의 77년 막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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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청사, 군청앞시대 영욕의 77년 막내려
  • 한기원 기자
  • 승인 2017.03.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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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읍은 홍성군의 중심고을이다. 홍성군은 옛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을 합한 군의 이름이다. 홍성의 본래 이름인 홍주(洪州)는 고려의 운주(運州)로 995년(성종 l4)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고, 1012년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 1358년(공민왕 7)에 목(牧)으로 승격해 1368년 지주사를 두었다가, 1371년 다시 목이 됐다. 사학자들은 고려시대 홍성의 명칭이 운주에서 홍주로 개명된 이유를 고려 태조 왕건이 934년 운주전투에서 승리한 후 성주인 긍준이 왕건의 편에 서서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우면서 태조로부터 ‘홍(洪)’씨 성을 하사받고 이름을 ‘홍규(洪規)’로 바꾸면서 홍규의 딸이 태조 왕건의 12번째 왕비인 ‘흥복원부인’이 되면서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다. 당시 왕건과 정략적으로 혼인한 홍규의 여식(흥복인부인 홍씨)을 12번째 왕비로 받아들이고 실질적 지배자인 운주성주 긍준이 왕건에 의해 홍규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고 홍주홍씨가 되면서부터 당시 호족인 홍(洪)씨 가문이 큰 세력을 유지하며 지배하는 과정에서 홍주(洪州)라고 개명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홍성읍은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1895년(고종 32) 8월 4일 13도제 실시에 따라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부를 폐지하고 군으로 통일할 때에 홍주군(洪州郡)이 됐다. 이후 1914년 (광무 17년) 3월 1일 군면의 폐합조치에 따라 홍주군과 결성군의 26개 면을 통합해 11개면으로 개편할 때 주남면과 주북면을 합해 홍양면(洪陽面)으로 신설됐다. 1940년 10월 1일 홍성읍으로 승격됐다.

결성(結城)은 본래 백제의 결사현(結巳縣)인데 신라 때 결성(潔城)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영현(領縣)이 되고,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 운주에 이속됐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監務)를 뒀다. 우왕(禑王) 때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1390년(공양왕 2)에는 진성(鎭城)을 두고 유민(流民)을 정착시켰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895년 군으로 승격, 1914년 홍주군·결성군 및 보령군의 일부를 통합해 홍성군이 됐다. 또한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결성군의 죽도리가 태안군 안상면 죽도리로 개편된이래 93년 동안 태안군에 속해 있다가 1989년 1월 1일부로 홍성군 서부면에 편입됐다.

한편 1940년 홍주면이 홍성읍으로 승격하고, 1942년 광천면(廣川面)이 읍으로 승격했다. 1983년 2월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서산군 고북면(高北面) 대사리(大寺里)와 결성면(結城面) 와리(臥里)를 갈산면(葛山面)에, 홍동면 월림(月林)·대평(大坪)·운용리(雲龍里)를 광천읍에, 결성면 중리(中里)를 서부면(西部面)에, 홍북면 내법리(內法里), 홍동면 구룡리(龜龍里)를 홍성읍에 각각 편입했다. 2017년 현재 홍성군은 홍성읍을 비롯한 광천읍, 홍북면, 금마면, 홍동면, 결성면, 서부면, 은하면, 장곡면, 갈산면, 구항면 등 2읍 9면으로 이뤄져 있으며, 인구는 지난 2월말 현재 10만 451명이다. 홍북면에 충남도청내포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충남의 행정타운으로 기능하면서 인구 증가를 견인하고 있으며, 읍(邑) 승격을 눈앞에 두고 있다.

■ 홍성읍청사와 홍성군인민위원회 사무실
1945년 해방과 함께 혼란 속에서 홍성에서는 자치위원회와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되자 홍성의 좌파는 인민위원회 결성을 준비해 10월 1일 결성식을 갖고 이인규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후 홍성군인민위원회는 사무실을 홍성읍사무소에 마련했다. 홍성읍사무소에 사무실을 마련한 인민위원회는 일차로 군수 마쓰모토(松本宣太)를 소환해 각목세례를 퍼붓고 사설감방에 가뒀다고 한다. 이는 마쓰모토 군수가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매일 직원들을 소집해 동방요배와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하게 하는 등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인민위원회에 접수부를 두고 군의 행정과 경찰의 행정을 인수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이 9월 말에 이미 홍성에 진주한 가운데 군 행정의 인수는 사실상 불가능 했다.

한편 인민위원회는 인민위원장 이인규와 보안부장 김동진이 나서서 경찰서를 접수하기 위해 당시 경찰서장 박유진과 담판을 했다. 박유진과의 담판이 여의치 않자 인민위원회는 10월 7일 새벽 월산(月山), 남장(南長), 마구형(馬口形), 간동(諫洞), 옥암리(玉岩里) 등의 주민들을 동원해 곤봉, 삽, 괭이 등을 들고 경찰서를 습격했으나,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한 가운데 경찰서 접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인민위원회는 9월 말 미군정 행정관의 진주와 경찰의 조직정비, 저항 등으로 인해 행정기능과 치안기능을 전혀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민위원장 이인규와 보안대장 김동진은 수배를 피해 홍성을 떠났다고 한다. 결국 홍성인민위원회는 한보국을 위원장으로 다시 뽑고, 보안부장도 전명재로 교체했다. 이렇듯 한때 홍성군인민위원회의 사무실로 사용됐던 홍성의 역사적 영욕을 안고 있는 홍성읍사무소 청사가 새청사로 이전을 계기로 살펴본 홍성읍 역사의 편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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