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순국 100주기 다채로운 추모행사 열려
상태바
이상설 순국 100주기 다채로운 추모행사 열려
  • 김주호 주민기자·스카우트홍성지구회장·향토사연구
  • 승인 2017.04.27 10: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0년은 청산리대첩 승전 100주년이 되는 해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해 학문에 뛰어나고 담론에 능하여 천재로 불렸던바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 교수, 관장, 한성사범 교관, 탁지부(현 재정경제부) 재무관(현 이사관)을 역임하고 1905년 의정부 참찬(현 총리실 관리관)을 거쳐 법무협판(현 법무부 차관)에 기용됐으나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통분을 참지 못하고 가두에 나서 울면서 대중에게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황제께 조약의 부당성을 진언하고 무효화 시킬 것을 간청했으나 힘이 없는 고종황제가 이를 성사시킬 수 없음을 인지하고 두문불출하다가 다음해(1906년) 간도의 용정에 가서 서전서숙(현 용정중학교)을 설립하고 다시 효과적인 구국투쟁을 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크로 망명했다.

1907년 화란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매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이준 열사, 이위종 선생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편으로 헤이그에 이르러 평화회의장을 방문하고 을사늑약은 왜적의 강압에 의한 것이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님을 호소했으나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므로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는 일본의 방해책동에 걸려 분루를 삼키고 말았다. 숙소에 돌아와 이준 열사가 분사하는 아픔을 겪은 후 낙심천만으로 유랑 길에 올랐다.(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이상설 선생은 한성법원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음) 미국을 거쳐 시베리아를 전전하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구국활동을 하던 중 경술국치(1910년)를 당하자 한일 강제병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세계 여러 나라에 보내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08년에 조직했던 대한협동회를 국권침탈 후에 성명회로 개편했다가 다음해 권업회로 재편해 권업회 회장으로 연해주지역 동포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운동을 벌이고 13도 의군을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의 대표자로 활동하다가 1917년에 이역만리 타국에서 순국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8월 필자는 군내 중고교생 30명으로 구성된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유적지답사단(홍성보훈지청 주관, 단장 이순규 보훈과장)과 동행해 역사문화 해설 담당자로 활동하고 돌아온바 있는데 이상설 선생은 죽음에 이르러 모든 유품은 불사르고 시신은 왜놈들이 판치는 고국에 운구하지 말고 화장해 수이푼강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선생의 유골이 뿌려진 수이푼 강변에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유허비가 서 있는데 필자는 이 유허비를 참배하면서 무거운 중압감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뭔가 모를 뿌듯한 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유허비 사방의 소나무 가지에 손바닥 반 정도의 태극기가 수십 개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태극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조그만 태극기가 뭬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 있지만 ‘청산리 역사대장정’(단장 조기준) 역사문화 해설 담당자로 여러 해 동안 만주벌을 다녔을 때 중국 공안원의 감시로 내 나라 태극기를 맘대로 들고 다니지 못했던 경험이 있어서 비록 손바닥 반 정도의 작은 태극기였지만 그렇게 반갑고 뿌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소각을 면한 선생의 역작 ‘산술신서’ 등이 뒤늦게 발견됨으로써 선생이 우리나라 근대 수학, 과학의 창시자임이 입증됐다는 사실이다. 구학문과 신학문을 고루 섭렵한 선생은 법학에도 능통해 가히 천재라 아니할 수 없으며 나라가 태평했다면 관계, 학계, 교육계 등에서 크게 공헌할 인물이었을 것이니 충청인, 아니 한국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왜놈들의 침략이 없었고 선생이 천수를 누렸다면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도 기대해 볼만했기에 더욱더 통분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비단  필자만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2017년은 바로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기가 되는 해이다. 지난 4월 21~22일 이틀 동안 선생의 출생지인 충북 진천군(군수 송기섭)주관으로 선생의 100주기를 추모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다. 시낭송, 백일장, 모음악회(이상 21일)가 열렸고, 22일 10시에는 숭렬사(이상설 선생 추모각)에서 추모제를 봉행했다. 전주시립국악관현악단의 추모음악까지 곁들인 추모제가 엄숙하게 진행됐고 군청직원들과 행사 도우미들이 너무나 친절했다. 필자는 이 행사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상념에 빠져 심정이 착잡했다. 우리고장 홍성에 군민의 성금으로 건립하기로 한 ‘평화의 소녀상’이 문화재청의 제동으로 아직도 건립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만행으로 채 피지도 못한 채 떨어진 못다 핀 꽃송이, 꽃피는 4월에라도 꽃이 피기를 바랐지만 4월도 그냥 넘어갈 공산이 크다. 충절의 고장이라는 이름이 부끄럽다. 하루 속히 건립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울러 3년 후 2020년은 청산리대첩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고장에서 태어나신 불세출의 명장 백야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절이 온 누리에 퍼질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 알찬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 지면의 주민기자 보도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