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전 퇴폐문화 추방하고 특용작물 재배로 부촌 일궈
상태바
50년전 퇴폐문화 추방하고 특용작물 재배로 부촌 일궈
  • 취재=허성수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7.10.20 10: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희망을 일구는 색깔 있는 농촌마을사람들<22>

홍동면 금당리 성당마을
성당마을회관 앞에서 이상구 이장(오른쪽)과 윤문기 대동계 회장. 두 사람은 금당초교 때부터 함께 다니며 마을을 지켜온 절친한 친구 사이다

자가용 없이 대중교통으로 홍동면소재지 가기 불편한 홍성생활권
지난해 새롭게 홍성-청양간 29번 국도 4차선으로 확장개통되면서
마을 중심 통과하던 옛 2차선 국도는 한산, 교통사고도 줄어들어
금당학구노인회는 5개리 어르신들 모여 친목다지며 한글반 운영


홍동면 금당리 성당마을은 면소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홍성읍으로 향하는 29번 국도를 끼고 있어 주민들은 주로 홍성읍내를 왕래하며 생활한다.

자가용 없이 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면소재지로 가려면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성당마을에서 홍성읍까지는 자동차로 10분 거리라 매우 가깝기도 하고 대중교통도 홍성읍과 청양읍을 왕래하는 버스가 30분~1시간 단위로 다녀 매우 편리하다.

■넓은 새길 뚫리면서 마을 안길 안전해져
성당마을은 원래 왕복 2차선 국도가 마을 한 가운데를 가르며 통과해 청양과 부여 등으로 향하는 교통량이 많았던 지역이었다. 지난해 마을에서 100m 가량 비켜난 곳으로 새롭게 뚫린 29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 개통되면서 마을중심을 가로지르는 옛 국도는 이제 한산해졌다.

그래도 버스는 넓은 새 길을 달리다가 마을이 있는 곳에는 옛날 길로 들어와 승하차를 시켜주기 때문에 주민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한편 마을 가운데 좁은 2차선 도로는 교통량이 눈에 띄게 줄면서 어린이들이 더욱 안전해졌다. 옛날에는 교통사고가 잦았다고 한다. 또한 한층 넓고 곧은 국도를 이용함으로써 여러 지역을 왕래하는데 시간도 훨씬 단축시킬 수 있게 됐다.

금당리 성당마을은 행정적으로 홍동면 동부지역 출장소 역할도 한다. 면 출장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금당초등학교가 있고, 의용소방대 청사, 보건지소, 홍동농협 분소 등의 공공기관이 있어 홍동면 동부지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성당마을의 주택들도 단정하고 품위가 있는 도회지풍이다. 황금들판 가운데 있는 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마치 면소재지 같은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푸르네지역아동센터 전경.

■석면광산 시절 청년회 마을변화 이끌어
“이 동네가 50~60년 전만 해도 제일 어려웠는데 지금은 홍동면에서 제일 잘 사는 동네입니다.”
성당마을 이상구(65) 이장은 매우 자랑스럽게 말했다. 1960년대까지 성당마을은 석면광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부지런하기만 하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어서 돈을 벌기가 쉬웠다. 하지만 쓰기도 잘 썼다.

“그때도 부촌이었습니다. 동네에 술집이 7~8개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주민들이 돈을 벌면 화투와 술로 탕진하기 일쑤여서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돈 떨어지면 다시 석면광산에 가서 일하고 벌면 탕진하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에게 의식개혁이 필요했다. 그때 뜻있는 청년들이 나서서 마을청년회를 조직하고 퇴폐문화 추방운동을 벌였다. 청년들은 몸에 유해하고 위험한 광산 일 대신 특용작물 재배로 눈을 돌려 농가소득을 높이자는 제안도 했다. 특히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은 당시 청년이었던 조진석(83, 현재 조기현 홍동면장 부친) 씨였다.

당시 특용작물로 들여온 것이 표고버섯과 인삼이었다. 주민들은 이들 품종을 재배하면서 더욱 부지런해졌고, 4계절 정성을 기울이면서 자연히 근면하고 건전한 농군으로 변화됐다. 뿐만 아니라 땀 흘려 노동한 것 이상으로 부농이 돼 도시인 부럽지 않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

“한창 때는 17가구가 인삼을 재배했어요. 지금은 고령화로 8가구만 재배합니다. 그래도 홍성군에서는 가장 많은 인삼을 재배할 겁니다.”

이상구 이장의 말이다. 인삼은 풍부한 노동력을 요구한다. 파종부터 6년간 인내하며 세심하게 보살펴야만 해 게으른 농법으로는 할 수도 없다.

한글을 배운 성당마을 할머니들의 작문 실력.

■5개리 어르신들 같이 모여 활동
성당마을은 현재 58가구 136명의 주민들이 산다. 마을회관은 동네 한 가운데 옛날 보건지소로 쓰던 건물과 마주하고 있다. 조원영(84) 씨가 마을회관 부지를 기증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용소방대 청사 부지도 내줬다. 원래 성당마을은 임천 조 씨 집성촌으로 부를 가진 자들은 스스럼없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다.

성당마을은 대동계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윤문기(66) 대동계 회장은 각 집안에 애경사가 있으면 청년회장과 이장, 이렇게 세 사람이 의논해서 돕는다고 했다. 대표적인 사업이 상여 메는 일이었으나 지금은 장례문화가 많이 바뀌어 다른 방식으로 상가(喪家)를 돕는다.

노인회는 성당마을 자체적인 모임을 벗어나 인근 5개부락이 함께 모인다. 성당마을이 중심인 데다 인근 부락에서 접근성이 좋아 노인들이 자체 모임보다는 여러 마을이 함께 모여 활동하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보통 40명이 모이는데 성당마을 경로당은 할아버지, 성당마을회관은 할머니 차지가 된다. 아예 할머니회가 따로 조직돼 있다고 한다.

“금당학구노인회로 불리기도 하는데 5개리 어르신들이 월례회를 하면서 친목을 다집니다. 할머니회는 주 2회 한글반 수업도 하는데 열심히 공부해서 글자를 깨치는 분도 있습니다.”

노인회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통상여 만들기 사업으로 꽤 수입이 좋았다. 홍성군에서 장례가 생기면 거의 성당마을로 주문이 들어왔다. 그러나 상여꾼들이 꽃상여를 메고 산에 올라가 매장하는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올해부터는 이 사업을 접었다고 한다.

■희망 이어가는 금당초등학교
마을회관과 마주하고 있는 옛 보건지소는 지금 푸르네지역아동센터(센터장 김도연)로 변해 방과후교실로 이용되고 있다. 5년 동안 비어 있던 건물을 임대하는 형식으로 제공했는데 공부방으로 재탄생되면서 자녀들의 공부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지역주민들에게 몹시 호평을 받고 있다. 푸르네지역아동센터를 이용하는 아이들은 14명으로 모두 금당초교에 다닌다.

금당초등학교는 56명의 학생이 재학하면서 희망을 이어가고 있다. 한때는 폐교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총동창회가 나서서 스쿨버스를 지원하고 전학 오는 학생에게 컴퓨터를 선물로 주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명맥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금당초교는 면소재지에 있는 홍동초교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홍동면의 희망이 되고 있다.

이상구 성당마을 이장


“마을안길을 상수도 공사하면서 뜯었다가 재포장했지만 너덜너덜합니다. 아스콘으로 깔끔하게 포장해주면 좋겠습니다.

이상구 이장은 땜질한 흔적이 남은 길이 미관상에도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마을에 무더운 여름날 밖에 나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없다며 쉼터 조성을 요청했다.

“어르신들이 그늘을 찾아 쉴 수 있는 고목도 없고 정자도 없습니다. 다른 마을에는 흔한 팔각정이 우리 마을에만 없어요.”

윤문기 대동계 회장


윤문기 대동계 회장은 이상구 이장과 금당초교를 같이 다닌 동창으로 오랜 지기다. 두 사람 다 태어나서 마을을 떠나본 적 없이 늘 가까이 형제처럼 지내며 마을 발전을 위해 앞장서 왔다.

“우리 마을은 주민들이 협조 잘 하고 잘 화합합니다.”

그의 단순한 말 속에 성당마을이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 농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윤 회장은 지난 40년간 인삼을 재배해오고 있다.

“우리 마을은 축산농가가 없고 특수작물을 많이 재배하는 청정지역입니다. 그래서 동네가 깨끗하죠.”

그의 손은 투박하고 주름살의 골도 깊었지만 미소만큼은 건강하고 청정한 성당마을을 닮은 모
습이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