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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야기

극작가 이강백 씨의 작품 중에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것 같소?’라는 유쾌한 가작이 있다.기후가 사람의 성정은 물론이려니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경우도 허다했다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준다.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을 쥐락펴락했던 절대자 나폴레옹을 몰락의 길로 내몬 것은 러시아 군이 나폴레옹 군대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나폴레옹군 스스로 무너지게 만든 러시아의 무시무시한 동장군이었다. 요즘 따라 날씨가 갑자가 추워졌다 슬그머니 풀리기를 되풀이 하니 일상의 평범한 일에 대해서조차 신경이 쓰여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혹독한 겨울 추위, 습기가 가실 길 없이 계속되는 장마, 발걸음만 살짝 디뎌도 먼지가 뽀얗게 일어날 정도로 가뭄이 지속될 때, 멀쩡한 정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일지라고 어찌 평정심을 유지하며 담담하게? 태평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사람은 날씨에 따라 변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변화불측한 일기에 일비일희 할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가, 마침 방학 때고 보니,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스스로 군자라고 말할 처지도 못되지만, 소인배가 되기는 정녕 싫어서 책이나 보며 수양이라도 하려는 심사로, 이 책 저 책 뒤지기에 이르렀다. 맨 처음 떠오른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였고, 뒤이어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들춰보려다 ‘백이숙제열전’ 부분을 십만 번도 더 읽었다는 근세 조선 선비 김득신의 일화가 생각나서 책을 덮고 말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평온과는 거리가 멀 때일수록 ‘수신서’가 제격이거니 생각되어, 고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집어들어 펼쳐보니, 훌륭한 스승을 만난 듯 반갑던 그 옛날의 설렘과 감흥이 일지를 않는 것이었다. 근대 유럽의 회의론적인 지성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을까 아니면 콩코드의 자연 속에서 인간의 참살이를 실천해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차분히 음미할까 하다가 골라잡은 것이 하필이면 청나라 말기 주일공사 참사관 황준원이 쓴 ‘사의 조선책략(내가 보는 조선책략)’이었다. 이 얇은 소책자는 1880년 7월 15일부터 8월 3일까지 일본의 신문물을 보고 배우고자 제2차 수신사로 도쿄에 갔던 대한제국의 김홍집에게 황준원이 자신의 생각을 그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북양대신 이홍장의 외교노선에 바탕하며 약술한 책이다. 핵심은 사철 얼지 않는 항구를 얻고자 하며 남진정책을 추구해온 러시아를 제지시키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고 일본과 손잡으며 청국과는 변함없는 교린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대한제국의 가장 좋은 외교노선이 되리라는 얘기이다. 얘긴 즉, 청나라는 변함없이 대한제국을 자기들의 속방으로 묶어놓고 끌어들이면서, 자기네가 두려워하는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속셈이고 일본이 속에 어떤 무서운 음모를 키워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판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옛날의 국가적 위기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국제질서 속의 처지가 별로 달라진 게 없어서 마음이 시원해지기는커녕 한층 더 답답해졌을 따름이다. 때는 겨울이고, 우울한 심사를 속 시원히 풀어볼 겸 택한 나의 마지막 선택은 셰익스피어가 쓴 ‘겨울이야기’였다. 그 옛날에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햇빛 찬란한 남쪽 나라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음울함 직한 보헤미아의 왕 폴리세네스를 초청해 잔치를 베푼다. 헌데 레온테스의 아내 허미온(헤르미오네)이 폴리세네스에게 보여준 밝고 명랑한 행동이 남편 레온테스로 하여금 자기 아내와 친구가 간통한 사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고, 질투심에 눈이 먼 레온테스는 아내를 감옥에 가두고 감옥에서 낳은 자신의 딸마저도 폴리세네스의 딸로 여기고 외면한다. 그런 와중에 자기 아들(왕자)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이로 인해 아내(왕비)마저 죽게 되는데…, 그렇게 16년의 세월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운명의 장난으로 레온테스의 딸 퍼디타와 폴리세네스의 아들 플로리젤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그 동안 레온테스는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반성한 결과 죽었다고 여겼던 아내가 되살아나고(다시 돌아오고) 친구간의 우정도 다시 회복된다. 또한 그들의 딸과 아들도 행복한 혼례를 맞이하기에 이른다는 얘기이다.

인생 말년에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왜 이런 이야기를 극화했을까? 이 드라마의 주제는 ‘시간(세월)의 놀라운 힘’과 ‘화해’로 귀결 지을 수 있겠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인생살이, 나날이 살벌해지는 국제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적절히 일깨워주는 대문호의 지혜의 말씀을 되새기노라면, 국가나 개인이 겪는 혹심한 겨울 추위조차 봄바람마냥 느껴질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

이원기 칼럼위원  hjn@hjn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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